[오늘과 내일/이동관]外國지도자 가르치려는 대통령

  • 입력 2005년 5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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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상대가 누구든 ‘할 말을 하고 얼굴도 붉히겠다’는 자세는 노무현 정부의 ‘외교 코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노 대통령의 전유물은 아니다. ‘투쟁형’인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도 자주 그랬다.

1979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앉혀 놓고 40여 분간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 대통령은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이 방을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1993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회담. YS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클린턴 대통령을 압박했다. 현안이던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우리 측이 발표해야겠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회담 시간이 1시간 20분을 넘어서자 일어서려는 클린턴 대통령을 YS는 “내 말을 더 들어 보라”며 주저앉히기까지 했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담하기 전, 한국 정부는 “세계의 모든 지도자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DJ를 만나고 싶어 한다”며 회담 성과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에게 ‘한 수’ 가르치려던 DJ에게 돌아온 것은 “북한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반박과 ‘이 사람(this man)’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이었다.

‘집권 3년차 증후군’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 증후군의 한 상징적 현상이지만, 대통령의 ‘말’이 많아진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토론공화국’을 주창해 온 노 대통령은 지난날에도 공·사석에서 ‘듣기’보다 ‘말하기’를 즐겨 왔지만, 요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외국 지도자들에게까지 ‘강의’를 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에서 역대 대통령을 닮아 가는 듯하다.

3월 20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독도가 일본에 점유 당하게 된 경위를 러-일전쟁의 역사에서부터 장황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접견시간이 20분 길어졌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이 강의 좀 했다”고 전했지만 라이스 장관은 나중에 “잘 들었다”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4월 8일 노 대통령은 미국의 대북조정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일행을 만나서도 무려 40여 분간 한일관계에 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고 한다. 북핵 문제를 중점 논의할 것을 기대했던 미국 쪽 참석자들은 “황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 대통령의 이런 태도에는 일본에 대한 괘씸한 감정뿐 아니라 ‘3년차 대통령’의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외교에서 지나친 자신감의 표출이나 직정적(直情的)인 행태가 자칫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할 말을 하고 얼굴을 붉힌’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6월 한미정상회담에서는 노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거론할 것이라고 외교통상부는 밝혔다. 미국 쪽에서 그렇게도 거부감을 갖고 있는 균형자론을 ‘강의’하려는 것은 아닌지, ‘강의’가 우리나라에 득(得)보다 실(失)을 더 안기지 않을지 걱정된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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