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1 뺨치는 성적전쟁… 사법연수원 예비 법조인들 숨막히는 하루

  • 입력 2005년 5월 12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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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검사 임용률이 20%가 안 되는 사법연수원생들은 요즘 시험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낭만과 토론이 사라진 지 오래. 11일 사법연수원 내 도서관에서 연수원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고양=변영욱 기자
판검사 임용률이 20%가 안 되는 사법연수원생들은 요즘 시험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낭만과 토론이 사라진 지 오래. 11일 사법연수원 내 도서관에서 연수원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고양=변영욱 기자
요즘 사법연수원생 사이에 유행하는 3대 거짓말은?

‘어제 잠만 잤다’ ‘책은 한 장도 안 봤다’ ‘과제는 손도 못 댔다’.

‘내신전쟁’ 중인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나 오갈 만한 농담이 최고의 엘리트라는 사법연수원생 사이에서 돌아다닌다. 미래에 대한 찬란한 희망 대신 시험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예비 법조인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11일 오후 5시 반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 마지막 수업인 ‘민사재판실무’를 마치고 몰려나온 연수원생의 발걸음은 세 갈래로 나뉜다. 도서관, 강의실, 사설 독서실. 기말시험과 수시평가를 앞두고 있어 5월은 연수원생 사이에 ‘죽음의 달’로 통한다.

연수원생 강모(32) 씨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전거를 향해 달려갔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연수원과 오피스텔 간의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한다.

연수원 도서관에서 만난 하모(27) 씨는 “시험기간이 아닐 때에도 대부분이 폐관시간인 자정까지 자리를 지킨다”며 “과중한 과제와 수시평가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다.

올해 연수원에 들어간 36기는 모두 987명. 대통령 산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11일 “우리나라 법조인이 선진국에 비해 아직 부족하다”고 발표했지만 연수원생들은 ‘밀리면 끝’이라는 각오로 생존경쟁을 치르고 있다.

올해 연수원을 수료한 34기 957명 중 19%가 판검사로 임용됐다. 10기 때만 해도 전체의 절반가량이 판검사가 됐다. 연수원생들이 합격의 기쁨을 오래 맛보지 못하고 다시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못 해도 변호사’란 말은 변호사 수가 늘어나는 바람에 ‘못 하면 바로 실업자’로 바뀌었다.

이런 연수원생들이 법조계 현안을 고민하는 것은 사치다. 한 연수생은 “지난달 법조론 수업 시간에 교수가 ‘로스쿨’과 ‘사법개혁추진’에 대한 토론을 시도했지만 연수원생들의 지식이 모자라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반마다 두 번씩 가던 수련회(MT)는 올해 한 번으로 줄었다. 시험이나 행사 뒤 가졌던 술자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지도교수들이 “공부를 위해 체육대회 예선에서 탈락하라”고 말할 정도.

한 지도교수는 “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마다 성적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는데 고시생 때보다 더 치열히 공부하는 이들이 지쳐서 포기해 버릴까 걱정”이라며 한숨을 지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로스쿨정원 논란▼

‘사개추위’가 최근 공청회를 통해 연간 로스쿨 입학정원을 1200명 선으로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적정한 법조인 수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달 지나치게 많은 변호사 배출은 공익성과 윤리성을 떨어뜨린다며 사개추위 방안에 대해 찬성 입장을 표시했다.

반면 서울대 법대와 한국법학교수회는 11일 “법조인의 특권을 제한하기 위해 한 해 로스쿨 입학정원을 3000명 이상으로 조정해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변호사의 수를 줄이려는 변호사와 로스쿨 선정 학교를 늘리기 위한 교수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대목이다.

사법연수원 관계자들은 법조인 수에 대한 논란보다는 배출된 법조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호(金현好) 연수원 취업기획교수는 “정부가 1990년대에 비법조분야의 법률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고시 합격생을 대폭 늘렸지만 정부기관이나 기업에는 변호사가 갈 만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쌀 개방 문제로 외국과 줄다리기를 벌이는 농림부에는 변호사가 한 명도 없고, 산업자원부에는 계약직 변호사가 3명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외무역통상을 관리하는 무역대표부(USTR) 협상단 전원이 법조인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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