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7년 피카소와 게르니카

  • 입력 2005년 4월 25일 19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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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명화로 꼽히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 게르니카. 두 게르니카의 운명적인 인연은 1937년 4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독일 공군은 게르니카 폭격에 나섰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스시코 프랑코의 부탁을 받은 아돌프 히틀러가 출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게르니카 지역 바스크인들을 탄압하려는 목적이었다. 폭격은 순식간이었고 잔인했다. 1654명이 사망했고 889명이 부상했다. 사상자는 대부분 노인, 여자, 아이들. ‘게르니카 학살’이었다.

당시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를 구상하던 피카소도 이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다. 분노에 휩싸인 피카소는 그때까지 구상하던 것을 모두 중단하고 게르니카의 참상을 벽화에 담기로 했다. 한 달 반 동안 몰두하며 황소 말 여인 등 60여 점의 크로키와 데생을 그린 뒤 이들을 화면으로 옮겨 넣었다. 인류 미술사에 길이 남는 명작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그림은 언뜻 보면 어수선하다. 그림에 표현된 소재들이 저마다 분리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서로 무심한 듯한 소재들은 절묘하게 연결되면서 게르니카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등의 빛은 히틀러군의 폭격을, 거대한 몸집의 황소는 무자비한 독일군을 암시한다. 그 옆에서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 말은 공포에 질려 죽어가는 희생자들이다.

실제 형상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표현과 추상적인 표현을 함께 구사함으로써 화면은 매우 긴박하고 격정적이다.

피카소는 그 참담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흰색과 검은색, 회색만을 이용했다. 무채색의 묵직함과 흑백의 대비는 전쟁의 공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했던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으로 반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독재자 프랑코의 치하에 자신의 작품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조국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작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곤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에 작품을 빌려 주었다. 1939년의 일이었다. ‘게르니카’는 1981년이 되어서야 조국 땅으로 돌아갔다. 기나긴 망명생활을 끝낸 감격적인 귀국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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