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8>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2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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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공(公)은 뉘시오? 어떻게 왔소?”

초나라 사자가 속으로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면서도 굳이 모르는 척 그렇게 물었다. 수하가 다짜고짜 윗자리로 가서 앉으며 꾸짖듯 말했다.

“나는 육현(六縣)에서 나고 자란 수하인데 이번에 한왕(漢王)의 사자로서 구강왕을 찾아뵈러 왔다. 허나 이 며칠 네가 하고 있는 짓이 하도 보기에 딱해 몇 마디 깨우쳐주려 한다.”

“곧 망해 없어질 나라의 사자가 어찌 이리도 무례한가? 감히 저희 주인을 왕으로 세워준 대국의 사자를 가르치려 하다니.”

초나라 사자가 힘들여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렇게 맞받아쳤다. 수하가 더욱 상대를 업신여기는 말투로 말했다.

“무릇 사자란 천하의 형세를 읽어 자신이 섬기는 주군(主君)의 존망과 안위를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는 네 목이 언제까지 붙어있을 지도 모르면서 무슨 수로 네 주군을 섬기고 지켜낼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소리냐?”

“구강왕께서는 이미 한나라와 우리 대왕을 따르기로 약조하셨는데 어떻게 너희 초나라를 위해 군사를 낼 수 있단 말이냐? 사자라면 마땅히 그런 변화를 알아 하루빨리 초나라로 돌아가야 하거늘, 너는 어찌하여 미련을 대고 있느냐? 구강왕께서 네 목이라도 잘라 한나라에 대한 충심을 증명하라는 것이냐?”

그러자 초나라 사자도 더 참지 못하고 낯빛이 시뻘게지며 소리쳤다.

“아무리 개는 주인이 아니면 누구에게든 함부로 짖어댄다[견폐비기주]지만 네 무례가 너무도 심하구나. 너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으로 내쳐진 유방의 심부름꾼으로서 구강왕을 뵈러왔으면 가만히 네 볼일이나 볼 것이지, 어찌 대국 서초의 패왕께서 보내신 사자의 객사(客舍)까지 찾아와 이같이 야료를 부리느냐?”

“머지않아 머리 없는 귀신이 될 자가 아직 입은 살아서 큰소리로구나. 다시 한번 깨우쳐주거니와, 그 변변찮은 머리라도 어깨위에 남겨주려거든 지금이라도 어서 서초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

수하가 그렇게 한 번 더 초나라 사신의 허파를 뒤집었다. 더 견디지 못한 초나라 사자가 자리에서 차고 일어나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씨근댔다. 그때 경포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진작부터 사람을 시켜 수하를 살피고 있었거나, 초나라 사자의 객사가 궁궐에 붙어있어 수하가 뛰어들 때 이미 소문이 그 귀에 들어간 듯했다.

“대왕. 일이 이미 이렇게 벌어졌으니 달리 어찌하는 수가 없습니다. 초나라 사자를 죽여 돌아갈 수 없게 하고, 대왕께서는 하루 빨리 한나라로 달려가도록 하십시오. 우리 한나라와 힘을 합쳐 패왕을 쳐부수는 것만이 대왕과 구강 사람들의 살길이 될 것입니다.”

경포를 본 수하가 한층 더 기세 좋게 소리쳤다. 일이 그렇게 되자 경포도 마침내는 마음을 굳혔다. 비정할 만큼 작은 머뭇거림도 없이 수하의 말을 받았다.

“알겠소. 내 사자의 가르침을 따르겠소.”

그리고는 번쩍이는 눈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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