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박씨는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는 또 다른 거래 은행을 찾아 사정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사정은 딱하지만 자기들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불안해 보이는 기업에는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는 게 은행 방침이라는군요.”
자금 수요가 늘어나는 연말을 맞아 중소기업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초비상이 걸렸다. 원자재 대금 결제일이 연말에 몰려 있는 데다 연말 보너스도 지급해야 하는 등 돈 쓸 곳은 넘치지만 돈을 빌릴 곳은 없다.
박씨 회사는 원청업체로부터 받을 돈이 꽤 있다. 하지만 원청업체는 “연말에 돈 쓸 곳이 많아 당장 외상을 갚기 어렵다”고 버티고 있다. 박씨는 이달 초부터 어음을 들고 다니며 현금으로 할인이 가능한지 사채시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중소기업 어음은 사채시장에서조차 할인이 잘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해만 해도 은행에서 빌린 돈은 20% 정도만 갚으면 대출이 연장됐어요. 그런데 올해에는 그게 안 됩니다. 은행도 올해 널뛰기한 부동산 가격 때문에 부실 가계대출이 워낙 많아 더 이상 대출 연장이 어렵다는군요. 회사 부동산도 거의 다 담보로 잡혀 있어 더 이상 보증 받을 여력도 없습니다.”
박씨는 매년 직원들에게 쥐여줬던 연말 보너스를 올해는 포기했다. 주거래은행 세 곳 중 두 곳에 갚아야 할 돈이 10억원이 넘는다. 원청회사에서 내년 1월 외상값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박씨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고리의 사채를 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의류 수출업체 사장 정모씨(60). 그도 회사를 시작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연말 보너스를 주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호텔 뷔페에서 전체 직원들과 송년회를 했지만 올해는 꿈도 꾸지 못한다.
정 사장은 “돈이 돌지 않아 회사가 한계를 맞은 것 같다. 방법은 건물이나 기계 등을 파는 것뿐인데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회사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푸념했다. 실제 정씨는 딸만 결혼시키면 23년간 이끌어 온 회사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씨는 “평생 기업을 꾸려오면서 올 연말처럼 힘겨운 겨울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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