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우울한 세밑…"20여년 기업했지만 올해가 최악"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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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체감경기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가운데 다수의 중소기업들이 힘겨운 연말을 보내고 있다. 금융권이 자금 경색과 자구책 등을 이유로 신규대출과 어음할인을 기피하는 바람에 직원들의 임금도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과 업계에 따르면 연말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이달 초순에만 부도를 낸 중소기업이 200개를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컴퓨터 부품 제조업체 사장 박모씨(39)는 22일 씁쓸한 표정으로 주거래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서는 만기가 됐으니 빌린 돈을 갚으라고 성화다. 당장 갚을 돈이 없는 박씨는 대출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사정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다음날 박씨는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는 또 다른 거래 은행을 찾아 사정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사정은 딱하지만 자기들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불안해 보이는 기업에는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는 게 은행 방침이라는군요.”


자금 수요가 늘어나는 연말을 맞아 중소기업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초비상이 걸렸다. 원자재 대금 결제일이 연말에 몰려 있는 데다 연말 보너스도 지급해야 하는 등 돈 쓸 곳은 넘치지만 돈을 빌릴 곳은 없다.

박씨 회사는 원청업체로부터 받을 돈이 꽤 있다. 하지만 원청업체는 “연말에 돈 쓸 곳이 많아 당장 외상을 갚기 어렵다”고 버티고 있다. 박씨는 이달 초부터 어음을 들고 다니며 현금으로 할인이 가능한지 사채시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중소기업 어음은 사채시장에서조차 할인이 잘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해만 해도 은행에서 빌린 돈은 20% 정도만 갚으면 대출이 연장됐어요. 그런데 올해에는 그게 안 됩니다. 은행도 올해 널뛰기한 부동산 가격 때문에 부실 가계대출이 워낙 많아 더 이상 대출 연장이 어렵다는군요. 회사 부동산도 거의 다 담보로 잡혀 있어 더 이상 보증 받을 여력도 없습니다.”

박씨는 매년 직원들에게 쥐여줬던 연말 보너스를 올해는 포기했다. 주거래은행 세 곳 중 두 곳에 갚아야 할 돈이 10억원이 넘는다. 원청회사에서 내년 1월 외상값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박씨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고리의 사채를 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의류 수출업체 사장 정모씨(60). 그도 회사를 시작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연말 보너스를 주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호텔 뷔페에서 전체 직원들과 송년회를 했지만 올해는 꿈도 꾸지 못한다.

정 사장은 “돈이 돌지 않아 회사가 한계를 맞은 것 같다. 방법은 건물이나 기계 등을 파는 것뿐인데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회사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푸념했다. 실제 정씨는 딸만 결혼시키면 23년간 이끌어 온 회사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씨는 “평생 기업을 꾸려오면서 올 연말처럼 힘겨운 겨울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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