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준우/'경쟁없는 학교'의 비극

  • 입력 2003년 12월 14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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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운명이 엄청난 재앙에 맞닥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여 멀리 몇 개의 암초와 작은 섬 두 개, 육지는 눈에 띄지 않는 외로운 섬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절망의 섬’에 뎅그러니 혼자 있게 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매년 대학입시철이 되면 로빈슨 크루소처럼 절망에 빠진 청춘들이 절규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목숨을 끊은 수험생의 소식도 들린다. 절망감이 얼마나 컸기에 이들은 삶의 무게, 아니 알량한 시험지의 점수를 버거워했을까.

이들의 삶은 경쟁사회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의 불행은 ‘무경쟁 학교’에서 싹텄을지도 모른다. 십수년간 삶의 축이던 학교에서 치열한 ‘경쟁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이들은 좌절을 맛봤을 것이다.

학생들이 내신성적을 한 점이라도 더 따려고 밤새워 아등바등 공부하는 현실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소리냐고 항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 한 과목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수십등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요즘의 학교다. 하지만 역대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집대성한 이른바 ‘문제 족보’로 안 틀리기 시합을 하는 ‘내신 부풀리기’가 진정한 공부요, 합리적인 경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도된 경쟁은 참사를 빚게 마련이다. 합리적인 경쟁은 존중할 만한 차등으로 이어지지만 오도된 경쟁은 차별만을 남긴다. 차별을 위한 단순 암기 위주의 경쟁은 종합적인 사고력을 요구하는 수능에 부적합할 수밖에 없다. ‘공부는 학원에서’라는 기괴한 구호가 나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교육 시장이 커질 요인이 학교에 잠재돼 있는 셈이다.

대학들은 고교의 오도된 경쟁, 차등 없는 ‘무경쟁’에 실망하고 있다. 대학 전형에서 학교생활기록부의 실질 반영률이 2002학년도 9.69%를 정점으로 8.58%(2003학년도), 8.21%(2004학년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미’를 맞을 학생이 버젓이 ‘수’를 들고 오는 현실에 대한 실망이다.

일선 고교는 주어진 권한마저 포기했다. 교사의 권위를 살릴 수 있는 교사추천서가 이제 폐기되고 있다. 서울대 등 많은 대학들이 교사추천서를 받지 않는다. 학생이 쓰고 교사가 서명한 추천서, 미사여구에 칭찬만 담긴 추천서는 쓰레기일 뿐이다.

학교가 이렇게 ‘무경쟁’ 행진을 계속하는 사이에 외부기관의 시험만이 학생을 평가하는 잣대가 됐다. ‘성적은 좋지 않으나 노력형이어서 발전 가능성이 엿보임’이라는 식의 솔직하면서도 차등적인 학생부 기록이 있고 또 그 내용이 존중받는 풍토였다면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버린 청춘들은 아마 극단적 행동을 자제했을지도 모른다.

학교가 제 역할을 하려면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고 한번쯤은 외친 기억이 있을 법한 학부모들이 자녀의 개성을 무시한 채 “역시 점수야”를 연발하는 순간 학교는 내신 부풀리기에 내몰린다. 합리적인 경쟁과 협동,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승복의 자세는 학교에서부터 길러져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지혜이자 원리가 아닌가.

로빈슨 크루소는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격리돼 절망에 빠졌지만 끈질기게 삶을 개척하고 28년 만에 구출돼 사회로 되돌아간다. 경쟁사회에서 정당한 경쟁을 무시하면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큰 절망을 자초하게 된다.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교가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경쟁, 아름다운 경쟁을 할 때에만 우리 학생들은 좌절에서 구출될 수 있다.

하준우 사회1부 차장 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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