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여자? 당신이 만들었어!…여성 1인극 두편

  • 입력 2003년 12월 11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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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갈 때마다 이 불황에 회사에서 안 잘리고 내 능력을 인정받은 거라고 큰소리치고 갔대요. 그러던 어느 날 바람 피우는 걸 딱 걸린거죠. 여자가 난리를 쳤더니 그 남자 하는 말이 '난 조강지처는 안 버려'라고 하더래요. 몰래 바람 피우는 게 아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대요' 연극 '발칙한 미망인'
'출장갈 때마다 이 불황에 회사에서 안 잘리고 내 능력을 인정받은 거라고 큰소리치고 갔대요. 그러던 어느 날 바람 피우는 걸 딱 걸린거죠. 여자가 난리를 쳤더니 그 남자 하는 말이 '난 조강지처는 안 버려'라고 하더래요. 몰래 바람 피우는 게 아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대요' 연극 '발칙한 미망인'
《연극 두 편이 있다. 모두 여배우가 주연인 모노드라마이고, ‘여성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여자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여자 이야기’를 말한다는 점도 같다. 여성 관객이라면 “바로 내 이야기”라며 무릎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서울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에서 31일까지 계속되는 ‘발칙한 미망인’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24일 막이 오르는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그것이다.》

# 남편을 죽이고 싶은 여자-발칙한 미망인

“애인 있어요? 하긴 없게 생겼다…. 농담이에요. 요새 유행하는 말 아세요? 요즘에는 애인 없으면 ‘6급 장애인’이라면서요?”

무대에 나선 배우가 주부로 보이는 한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넸다. 순간 객석을 감돌던 긴장은 일순간 풀어지고 작은 웃음이 터졌다. 배우가 말을 이어간다.

“한 부부가 있었대요. 아내는 남편에게 미치도록 사랑받기를 원했죠. 하지만 남편은 아내를 안아주지 않았던 거죠. 어느 날 침대에 누운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어요. 왜 날 안아주지 않아요? 남편이 그러더래요. 아내가 여잔가? 가족하고 하면 근친상간이야.”

이번에는 웃음 뒤로 여성 관객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발칙한 미망인’의 한 대목. 탤런트이자 연극배우인 성병숙씨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을 연기한다.

"성기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비밀시되고 있습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에서 나오는 잘못된 신화를 만들어 냅니다." "누군가가 내 콤플렉스까지 다 좋아해주니까. 가슴이 뭉클하더라니까. 섹스는 몸으로 하는게 아니더라. 정말 아니더라. 여기로 하는거야. 여기(머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한때 잘 나가는 여배우였던 주인공은 사랑 때문에 가난한 작가와 결혼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작가는 곧 성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아내를 사랑하기보다는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 여자들은 작품의 소재가 됐다. 남편에게서 소외감을 느낀 여배우는 ‘발칙한’ 음모를 꾸민다. 남편 독살 계획. 연극은 여배우가 훗날 남편의 동상을 찾아와 늘어놓는 넋두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성씨는 “내 스스로도 너무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중년 여인이라면 한번쯤 자신에게 소홀한 남편이 미워서 죽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라며 “이 연극을 만들면서 연출자와 ‘이 시대의 여인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부부가 연극을 보고 나서 남편이 ‘독살당하지 않으려면 잘해야 되겠네’라고 부인에게 농담하는 걸 봤어요. 부부가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거지요.”

# 여자가 말하는 여자의 몸, 여자의 성 - 버자이너 모놀로그

서주희씨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억눌린 여성의 성(性)을 다양한 시점에서 표현하는 작품이다. ‘버자이너(Vagina)’는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 연극에서는 영어 대신 두음절 우리말이 그대로 사용된다. 서씨는 2001년과 지난해에 이어 3번째로 공연한다.

서씨는 “한마디로 여성의 성기를 매개로 여성의 성을 말하는 연극”이라며 “생물학적, 의학적인 정보가 아니라 성기를 통해 느끼는 여성의 감정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극작가이자 시인, 사회운동가인 이브 엔슬러가 희곡을 쓴 이 연극은 1996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위노나 라이더, 수전 서랜던, 귀네스 팰트로, 우피 골드버그, 케이트 윈즐릿, 멜라니 그리피스, 브룩 실즈, 클레어 데인즈, 앨라니스 모리셋 등 스타들이 거쳐 간 연극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초 초연됐으며 2001년 말 서씨가 토크쇼 형식을 공연에 접목해 새롭게 무대에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서씨는 여섯 살 소녀부터 70대 할머니까지 9명의 여인을 연기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과 그에 대한 분노, 성의 기쁨을 표현한다. 출산의 경이, 성폭행 당한 충격 등도 주제에 포함된다.

그는 친구에게 전화하듯 애인과의 관계를 속속들이 털어놓기도 하고, 때로 다양한 ‘신음 소리’를 내며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원작은 ‘페미니즘’의 의미가 커요. 하지만 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 얘기를 그대로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서씨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아직도 음지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강하다”며 “성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냈다는 점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시각으로-여성연극

여자는 언제 남편을 죽이고 싶어질까. 최근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이란 ‘소설’을 펴내 화제가 된 배인순씨가 그런 심정이었을까. ‘발칙한 미망인’은 소설 속 여인의 일생과 닮았다. 한때 잘 나가던 연예인. 재벌 회장과 결혼한 주인공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듯 했지만 이내 남편은 다른 여자들에게 빠져 아내를 소홀히 대한다. 하지만 소설 속 여인은 남편의 그런 행동을 그저 참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 여인은 ‘그가 40대 중반부터는 전혀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외도가 심한 남편일지라도 여자로서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던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하면서.

그러나 연극은 비장한 분위기를 유쾌하게 끌고 간다. 주인공은 정신병원에서 방금 나온 인물이다. 그래서 남편을 진짜로 독살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약을 먹고 자살한 남편을 두고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처음 상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서갑숙씨의 성체험 고백서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 연극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여성의 성 정체성을 얘기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인터넷 게시판에도 “연극을 보고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는 내용의 글이 여러 편 올라와 있다. 연극은 억눌린 여성의 심리적 해방구가 되는 셈이다.

연극평론가 오세곤 교수(순천향대)는 “여성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의도하는 연극은 여러 편 있었다”며 “관객은 그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주인공과 같은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유희정씨(경상대병원)는 “연극은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화보다 훨씬 감정 이입이 쉬운 매체”라고 설명했다.

02-762-0810(‘발칙한 미망인’), 02-764-8760∼1(‘버자이너 모놀로그’)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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