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에즈라 파운드 사망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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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祖國)의 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했던 시인.

이미지즘 운동을 촉발하며 현대시의 위대한 시대를 살았지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을 옹호함으로써 반역사적인 범죄에 가담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

그는 1908년 자신이 태어난 ‘반은 야만스러운 나라’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운드의 주변에는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같은 20세기 영미문학의 거목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인들의 시인’답게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격려하고 집필을 거들었다. 엘리엇의 ‘황무지’ 초고를 반으로 쳐낸 것은 그였다.

그의 시의 자양(滋養)은 자연에서 건져 올린 생태학적 상상력이었다. 그는 예술가를 곤충의 촉수(觸手)에 비유하며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을 강조했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그것은 그릇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파운드는 1920년 ‘맛이 다 간 창녀’와도 같은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무솔리니를 만난 파운드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생산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하자 드디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정부가 출현했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그는 무솔리니를 토머스 제퍼슨에 빗대면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일종의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형태로 충전된 천재”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 파시즘을 찬양하는 일련의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는데 이런 말도 있었다. “어떤 천재가 있어 유대인을 몰아내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를 지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45년 그는 미군에 체포됐다. 재판에서 정신병 환자로 판정받은 그는 12년 동안이나 병동에 갇혀 있다 엘리엇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엘리엇을 세상에 알린 것은 그였지만 그를 다시 세상에 내보낸 것은 엘리엇이었다.

전시에 공공연히 적국을 찬양한 파운드. 그는 변명의 여지없는 반역자였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미국의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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