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의 대화]최재천/ ‘DMZ 50년’ 위대한 자연의 힘

  • 입력 2003년 7월 23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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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비무장지대가 사람의 손아귀를 벗어난 지 50년이 되는 해다. 50년은 한 세기의 절반이나 되는, 짧지 않은 세월이다. 예전 같으면 거의 한평생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하지만 50년을 지구의 역사인 46억년에 비춰보면 정말 눈 깜짝할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야 한다.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그 짧은 순간 비무장지대의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법 의젓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연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우리 정부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를 관광대국으로 키우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관광사업이 웬만한 굴뚝산업보다 훨씬 큰 부가가치를 지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국 방문의 해’라는 식의 사뭇 노골적인 구호를 외쳐본들 그 성과가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다.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내가 외국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그 많은 나라들 중 구태여 우리나라를 찾을 까닭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랜드캐니언을 보고 난 다음 애써 설악산의 기암절벽을 찾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우리는 나름의 독특한 역사와 자연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야 한다.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다른 곳은 다 마다하고 안동을 찾은 사실을 곱씹어볼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임진각이다. 그곳의 자연경관이 특별히 수려해서 찾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 반세기 동안이나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데 한없는 호기심과 매력을 느낀다.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베푼 좋은 점은 없나 생각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처럼 분단의 설움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란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나는 잘 보전된 비무장지대의 자연을 한 많은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 넓은 지역은 아니지만 비무장지대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값진 자연자원을 갖고 있다는 걸 전 세계가 알고 있다. 다만 우리만 그걸 모르고 집어던지려 하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는 ‘아시아 소사이어티’ 주최로 한반도 휴전협정 조인 50주년을 기념하며 비무장지대의 보전 대책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하버드대의 생물학자 윌슨 교수와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국 대사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한목소리로 비무장지대의 생태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나는 생태적 가치에 덧붙여 경제적 가치를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만 따로 관광상품을 개발할 일이 아니다. 만리장성과 비무장지대를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관광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막힌 황금시장을 포기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거창한 개발 계획도 필요 없다. 그저 분단 전 남북으로 나 있던 도로들만 다시 연결하면 간단히 끝난다. 우린 이미 그 작업을 시작했다. 무지를 으스대며 자랑스러운 삽질을 해대더니 비무장지대의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다시 기차와 차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그 사이의 작은 길들을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끊어진 길목에 사는 주민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길들이 다시 개통되는 날이면 비무장지대의 자연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을 수 없다. 민족의 분단이 끝나면 자연의 분단이 시작될 것이다.

생태학자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서식지 분단(habitat fragmentation)’의 영향에 관해 연구해 왔다. 동일한 면적이라도 하나의 큰 덩어리로 있는 서식지가 여러 작은 서식지들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생물군집을 유지한다. 마음에 내는 길은 사랑으로 이르지만, 자연에 내는 길은 언제나 파멸을 가져온다. 더 늦기 전에 남북이 마주앉아 비무장지대의 미래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곳에 또 다른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길 바란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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