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달러서 주저앉나]<2>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입력 2003년 7월 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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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시 시화공단에는 요즘 중국정부 관리들이 자주 찾아와 ‘중국으로 오라’는 내용의 투자설명회를 연다. 얼마 전만 해도 공장부지 무료제공, 전기료 감면 등의 혜택을 내세웠지만 최근에는 ‘노사문제 해결’을 가장 먼저 제시한다. ‘노사분규 무풍(無風)지대’로 여겨졌던 시화공단이었지만 올 4월 지역 일반노조가 결성된 뒤 파업에 질려 문을 닫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노조원들이 천막을 쳐놓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하루 종일 시위를 벌이는 모습도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

▽국내외 기업 내쫓는 노사분규=국내 유명 로펌인 A법무법인은 올해 초부터 외국기업의 의뢰로 국내 상장회사인 B사 인수를 추진했다.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으나 막판에 B사 노조의 반대에 부닥쳐 사실상 손을 들었다.

▼연재물 목록▼

- <1>'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외국인들은 한국의 대립적 노사관계에 고개를 내젓는다.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 윌리엄 오벌린 회장은 “20년 전 쯤 통했을 노동법과 노동관행이 한국에는 여전히 존재한다”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노사관계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의 성장률은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국계 S은행은 정리대상 직원들이 2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보상비를 요구하자 아예 구조조정을 포기했다. 그 돈이 있으면 애당초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계 H은행 한국지사는 독특한 인사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우선 2년간 계약직으로 채용한 뒤 성향을 파악하고 나서 정규직원으로 돌린다.

노동문제는 한국기업들의 폐업 및 ‘탈출’도 부추기고 있다.

경제5단체는 최근 “노동계 파업이 계속될 경우 기업들은 공장 문을 닫거나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상당수 기업에서는 일부 품목의 해외법인 생산량이 국내 생산량을 추월하면서 생산 중심축이 이미 해외로 넘어갔다.

▽‘상식의 선’을 넘어선 노동운동=국내 노동현장에서는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기아자동차 노조 집행부는 ‘샌드위치 데이’였던 5월2일을 아예 휴무일로 지정했다. 노조 입김이 강한 일부 민간기업 및 공기업에서는 인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LG경제연구원 김기승(金基承) 연구위원은 “노조는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해서만 얘기해야 한다”며 “노조의 경영권 인사권 참여 요구는 한 마디로 월권(越權)행위”라고 지적했다.

기업 차원에서 협상하기 힘든 주5일 근무,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정치적 이슈를 내걸며 노조가 나서는 것도 선진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다보니 ‘노조 공화국’ ‘노동귀족’이란 말도 나온다. 경제전문가들은 “어떤 국가든 ‘노조하기 좋은 나라’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보다 우선해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경영권 인사권 참여 요구는 회사측에서 투명경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맞선다. 민주노총 손낙구(孫洛龜) 교육선전실장은 “노동계의 경영권 참여 요구는 독일처럼 이사회에 노조 대표가 참여하는 나라에 비하면 초보적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선진형 노사관계를 키우자=아그파코리아의 마티아스 아이히혼 사장은 “한국의 노사 양쪽 모두 ‘터프’하다”면서 “노조는 파업으로 몰고 가는 습성을 버리고, 사용자는 투자 결정, 자금 조달에 관한 정보를 노조에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하대 박기찬(朴基贊·경영학) 교수는 “1세대 노조는 생계형, 2세대 노조는 이념형, 3세대 노조는 비즈니스(회사와 공생관계)형, 4세대 노조는 지식공유형”이라며 “한국은 아직 2세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방용석(方鏞錫) 전 노동부 장관은 “정부는 노동문제를 노사관계에서만 보지 말고 전체 경제의 틀 속에서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제프리 존스 전 AMCHAM 회장은 “한국의 노사는 대화의 문화를 길러야 한다”면서 “노조의 강성 이미지를 벗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자기혁신과 투명성 강화를 통해 노조에 끌려가지 않는 새로운 노사관계를 만드는 사용자. 합법적 노조활동은 보장하면서도 불법행위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는 정부. 한국이 ‘노조 공화국’이란 오명을 씻기 위한 해법은 여기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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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使 '파트너 경영'…年20%씩 성장▼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스웨덴 볼보사가 삼성중공업의 굴착기 사업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는 선진형 노사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인수 당시 이 회사는 670억원의 순(純)손실을 기록한 ‘부실덩어리’였다. 하지만 2년 만인 2000년 253억원의 흑자를 냈고 매년 20% 가까운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 순이익은 720억원. 이 같은 고속 성장의 배경에는 노사간 상호 신뢰와 협력이 깔려있다.

볼보기계는 매분기 말 첫째주 수요일을 ‘노사화합의 날’로 정해 모든 생산라인을 세우고 노사가 협의회를 개최해 함께 토론을 벌인다. 회사와 노조는 말 그대로 파트너다.

회사 경영현황은 매월 15일까지 사원의 개인 e메일로 통보된다. 분기에 한 번은 사장이 직접 비디오 메시지로 전 직원에게 경영상황을 알린다.

또 모든 경영진 회의는 노조를 비롯한 전 직원에게 열려 있다.

석위수(石衛洙) 공장장은 “투명경영을 실천하다 보니 임원 및 직원이 경영현황에 대해 아는 수준이 거의 같을 정도”라며 “볼보 내에는 상의하달식의 권위주의적인 문화 대신 서로 상의하는 풍토가 자리잡았다”고 전했다.이 회사의 노사 관계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회사 설립 이듬해인 99년 창원공장에서 생산직 노조가 설립됐고 2000년에는 서울 본부의 직원들이 사무직 노조를 별도로 세웠다. 회사가 해외에 매각되면서 직원들 사이에 고용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던 시절이었다.

2001년 성과급과 임금인상률을 놓고 노사간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기간에 회사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를 통해 무리한 투쟁은 노조원들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유럽 勞使 '대립서 타협으로'▼

‘과격한 시위대, 파업으로 툭 하면 끊기는 대중교통, 그래도 별 불만 없는 시민들.’

독일과 프랑스 하면 흔히 연상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난 10여년간 유럽 대륙의 ‘대표주자’ 격인 이들 두 나라의 노사문화는 ‘대립’에서 ‘타협’으로 꾸준하게 바뀌어왔다. 오랜 경기둔화에 시달리면서 ‘국가 경제가 우선’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 후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독일. 1954년 이후 단 한 번도 노사협상에서 밀린 적이 없던 금속노조 소속 31만명의 노동자가 6월 28일 4주간에 걸친 파업을 접고 무조건 업무에 복귀했다.

지멘스 바스프 폴크스바겐 등 독일의 대표적 기업도 최근 2∼3년 동안 수천명씩 해고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지만 노조의 반대는 예상보다 작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시대적 추세로 보고 있기 때문. 독일의 비정규직 근로자는 9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해 91년 543만명에서 2001년 885만명으로 늘었다.

독일의 노사관계가 타협적으로 바뀐 데는 개별 교섭이 증가한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노동계가 산별노조 전환을 서두르는 것과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각기 다른 경영환경을 가진 기업별로 단체협약이 증가하는 추세다. 독일 전체교섭에서 개별교섭이 차지하는 비중은 91년 37%에서 2001년 50%로 늘어났다.

프랑스에서도 90년대 초 공기업 민영화가 본격화되면서 대량 해고가 이뤄졌지만 노조는 이에 동의했다. 수익을 내지 못하면 회사가 생존할 수 없다는 판단과 르노자동차 등 먼저 민영화한 기업의 경영실적이 좋아진 것이 노조의 반대를 줄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사회당 출신인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는 ‘최저임금 인상안’을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막는다며 거부했다.

프랑스 노사관계는 99년 ‘3+5 회담’ 이후 더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회담에서 3개 사용자 단체와 5개 노동단체는 노사문제에서 정부 입김을 배제하고 자율로 해결하자고 합의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동계는 사측을 무시하고 정부에 문제 해결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부가 사소한 문제까지 관여하면서 자율 해결을 가로막는 부작용이 나타나자 방향을 전환했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정미경 홍석민 김광현

천광암 이은우 신치영

이헌진 고기정 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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