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佛 대표적 지성 하버마스-데리다 공동선언

  • 입력 2003년 6월 15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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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 사상가인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74)와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73)가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분열된 유럽의 현 상황을 반성하며 유럽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조언을 담은 글을 발표했다.

‘우리의 혁신: 전쟁 이후 유럽의 재탄생’이란 제목의 이 글은 신문 한 면을 채우는 분량으로 최근 유력지인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www.faz.net)’과 프랑스의 ‘리베라시옹(www.liberation.fr)’에 동시 게재됐다. 본래 하버마스가 작성한 글이지만 데리다가 이 글의 기본 전제와 전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공동집필자로 낼 것을 제안해 두 사상가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들은 9·11테러 직후 두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을 묶은 책인 ‘테러 시대의 철학(Philosophy in a Time of Terror)’을 6월초 미국에서 발간하면서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해 왔고 이를 토대로 이번 글이 작성됐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공동선언 요약 ▼

3월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라크전쟁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동아일보 자료사진

스페인에서는 이라크전쟁을 지지하는 유럽 정치인들이 모이는 한편 유럽 각국의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반전 시위를 벌였던 2003년 2월15일을 유럽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유럽의 분열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 유럽 정치의 어려움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유럽의 중추 국가들은 스스로를 작은 유럽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유럽은 국제적 차원과 유엔의 틀 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적 일방주의에 대해 균형추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미국과 다른 ‘유럽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에릭 홉스봄이 ‘황금시대’라고 불렀던 20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유럽에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정치적 정서가 형성됐다. 이런 공통의 정서는 냉전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형성된 것이지만, 2월15일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전시위는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이같은 정서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것들은 미래의 유럽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유효한 요소들이다.

우선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이 확립된 유럽에서는 종교가 더 이상 어떤 정치적 위상을 갖지 않는다. 매일의 업무를 기도로 시작하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종교적 사명과 결부시키는 대통령을 유럽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서 정치는 자유를 보장하는 매체이자 조직능력을 가진 제도로 받아들여지는 한편 자본주의는 계급대립과 연관돼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 국가의 조정능력을 신뢰한다.

유럽의 정당체제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의 상호경쟁을 통해 진보란 것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 덕택에 진보를 통한 득과 실 사이에서 균형 있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계급대립이 집단적 행위를 통해 방지될 수 있다는 생각은 노동운동이나 기독교사회운동에 공히 정착되어 있다.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감수해야 하는 능력위주의 개인주의적 정서에 반대해 ‘보다 많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의 정서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의 경험은 인명 손상에 대한 매우 높은 의식을 가져왔다. 이는 유럽의회와 유럽연합(EU)이 사형제도의 폐지를 가입조건으로 내세우는 데서도 나타난다.

각종 전쟁의 경험과 EU의 성공적 역사는 전쟁과 같은 국가권력 행사를 자제시키기 위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주권의 상호제한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유럽인에게 심어줬다.

식민지의 운영경험과 식민주의 제국 붕괴의 경험으로 인해 유럽은 스스로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취할 수 있게 됐다. 그 덕에 우리는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분리하지 않는 칸트적 의미의 ‘세계내정치(Weltinnenpolitik)’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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