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로마의 휴일

  • 입력 2003년 6월 13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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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오드리 헵번처럼 귀엽게 먹을 수 있는 여자가 또 있을까. 영화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깜찍함도 인상적이지만 남자 주인공 그레고리 펙의 매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궁궐을 몰래 빠져나온 공주를 길에서 ‘건진’ 신문기자 그레고리 펙. 1면 특종 욕심에 공주를 이리저리 모시고 다니지만 결국 사랑 때문에 기사감을 포기하는, 정말 남자다운 남자였다.

▷이탈리아제 베스파 스쿠터에 공주를 태우고 로마를 달리는 호쾌한 미소,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울먹이는 공주에게 “애쓰지 말아요”하며 달래주는 깊은 심지,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사랑 이해 연민 안타까움 등을 담아 공주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은 세계의 영화팬을 매료시켰다. 영국에선 공주 역의 오드리 헵번이 자유분방한 마거릿 공주와 닮았고 그레고리 펙은 마거릿 공주가 좋아했던 피터 타운젠트라는 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기자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지 그레고리 펙의 두 번째 부인 베로니크 파사니는 그를 인터뷰했던 여기자였다. 이 미남배우와 첫 데이트를 하느라고 다른 배우를 인터뷰하는 것도 빼먹었다니, 사랑을 위해 기사감을 포기했던 ‘로마의 휴일’ 속 그레고리 펙과 닮은꼴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 ‘로마의 휴일’ 신문기자 역이었다면 배우로서 역량이 빛났던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였다. 인종차별에 맞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역할은 영화 속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이 나라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대사는 1960년대 민권운동 현장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종종 인용되고 있다. 그가 온몸으로 보여준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명예와 지성, 정의에 대한 확신과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은 미국인들이 실제 삶에서 높이 평가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레고리 펙이 연기 잘하는 배우에 그치지 않고 ‘할리우드에 마지막 남았던 진정한 귀족’으로 평가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 고뇌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는 그의 영화 속 이미지는 실생활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편견과 불공평 때문에 제 몫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베트남 반전 시위에 나서고 자유주의적 정치신념을 드러내던 행동하는 배우였다. 그러면서도 배우로서 최고의 의무는 관객을 즐겁게 하고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연기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던 그레고리 펙은 2차대전 후 안정을 원하던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신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천국의 휴일’로 떠난 이제, 누가 우리의 휴일을 즐겁게 해줄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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