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非常]<10>증시 침체의 끝은 어디

  • 입력 2003년 6월 10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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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침체가 1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주식투자자들이 신용불량과 우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종합주가지수가 514까지 떨어졌던 3월17일 시세판을 뒤로 하고 괴로워하는 한 투자자. -동아일보 자료사진
증시침체가 1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주식투자자들이 신용불량과 우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종합주가지수가 514까지 떨어졌던 3월17일 시세판을 뒤로 하고 괴로워하는 한 투자자. -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사는 C씨는 지난해 11월 초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스스로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엔 실패했지만 단란했던 신혼살림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주식투자로 1억원 이상을 날리면서 진 빚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직후 회사를 그만둔 뒤 뾰족한 일자리도 없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업 주식투자자’가 된 경기 고양시 일산의 K씨도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월급쟁이 때보다 더 벌었지만 증시가 가라앉으면서 원금을 거의 모두 날린 것이다. 7000만원으로 시작해 한때 2억원으로 불었지만 지금 남은 돈은 750만원 정도.

▽침체하는 증시=증시가 1년 이상 장기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종합주가지수는 10일 649에 마감됐다. 올 들어 가장 낮았던 3월 17일(515.24)보다는 25%가량 올랐지만 작년 4월 18일(937.61)보다는 30% 이상 떨어진 상태다. 코스닥지수도 10일 48로, 시작할 때인 96년 7월 1일 기준지수 100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2000년 3월 10일에 기록했던 283.44까지 오르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연재물 목록▼

- <9>지방금융이 무너진다
- <8>돈 혈맥이 막혔다
- <7>지방의 소비와 유통
- <6>벼랑에 선 노사관계
- <5>실업의 두 얼굴
- <4>투자 안하는 경제
- <3>벤처 희망은 없나
- <2>고비 맞은 중소기업
- <1>위기의 수출산업

개별 종목별로는 더욱 참담하다. 거래소에서 이 기간에 주가가 조금이라도 오른 종목은 94개로 전체 상장종목 817개(총상장종목은 854개이나 기업분할, 신규상장 등으로 비교가 불가능한 종목 37개 제외)의 11.5%에 불과하다. 평균 상승률도 고작 26.4%다. 하지만 88.1%에 이르는 720개 종목은 주가가 평균 39.6% 하락했다. 특히 주가가 50% 이상 떨어져 반토막도 더 난 종목이 213개(26.0%)나 된다. 이들의 평균 하락률은 64.6%.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가 17.9% 떨어졌고 현대자동차(37.7%) 국민은행(41.6%) SK텔레콤(36.3%) 포스코(19.4%) 삼성증권(42.7%) 등도 모두 폭락 대열에 들었다.

▽무모한 투자행태=경원대 경영회계학부 강병욱 교수가 1990년 이후 증시와 자살의 관련성을 분석한 결과 “주식투자에 실패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자주 나오면 증시는 바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작년 말부터 올 1·4분기에 주식실패로 인한 자살(시도)과 가정파탄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온 것으로 미루어 최악의 국면은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주식발행, 자사주 취득 및 배당금 지급 추이 (단위:억원)
주식발행배당금 지급자사주취득
1998141,58015,113
1999411,13928,414
2000143,48533,58656,742
2001121,60333,29077,648
200298,96949,46991,172
200330,99548,936
주식발행은 발행가 기준으로 거래소와 코스닥을 더한 것이며, 배당금과 자사주는 거래소만의 수치임. 2003년 주식발행은 1~4월중, 자사주취득은 1~5월중. -자료:증권거래소

하지만 지난해 4월 종합주가가 1,000을 넘어선다는 말을 믿거나(부산의 K씨), 종합주가 700이 바닥이라는 말에 베팅을 한(대전의 P씨)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난 손해를 안고 몸살을 앓고 있다. 싼 금리에 홀려 은행돈을 빌려다 주식투자를 한 사람은 주가하락으로 이자도 내기 버거운 실정이다.

▽증시 침체의 역작용=주가하락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개인파산에까지 이르게 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되고 있다. 또 투자자의 실질소득을 줄어들게 함으로써 소비를 덜하게 하는 역(逆)자산효과를 가져와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증시침체는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주가가 떨어지면 신규 상장이나 유상증자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상장·등록기업이 작년에 증시에서 끌어 쓴 돈은 9조8969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8.6% 감소했다. 증시가 활황이었던 99년에 41조1139억원이나 조달해 부채비율을 떨어뜨리는 등 기업구조조정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 해마다 조달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반면 상장회사가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등으로 증시에 돌려주는 돈이 조달규모보다 커지고 있다. 상장회사는 지난해 9조1172억원어치의 자사주를 샀고 4조9469억원을 배당해 14조641억원이 증시로 역류했다. 조달금액보다 4조1672억원(42.1%)이나 많은 규모다.

삼성증권 임춘수 상무는 “증시가 2001년까지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였지만 2002년부터는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으로 끌어온 자금을 되돌려 주는 식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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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 벗어나려면▼

한국 주식시장이 침체를 벗어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할까.

전문가들은 우선 한국 경제와 기업들이 건강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투자자와 시장의 질도 한 단계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종우 한화증권 리서치센터 팀장은 “우선 산업구조 자체가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중심의 발전에 성공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100에서 500∼1,000대로 크게 올랐지만 1,000선 이상으로 도약하려면 실물경제의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이 센터장은 “미국 증시도 1960년대부터 20년 동안 비슷한 문제로 침체했지만 산업구조가 서비스와 정보기술(IT) 중심으로 바뀌면서 도약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신성호 우리증권 이사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 겨룰 기술이 있는지, 반도체나 휴대전화 같은 독창적이고 독점적인 상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계속 개척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벌어들이는지도 중요하다. 임춘수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 기업의 실적이 어떤 해에는 좋다가도 다음해에는 크게 나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할 일도 많다.

우선 장기투자 문화 정착을 위해 장기투자자에게 배당소득세를 감면하고 배당에 인색한 기업들이 배당금을 높이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 이와 관련, 정부는 최근 1년 이상 주식형 펀드를 보유한 투자자에 대해서는 배당소득세 등 16.5%의 세금을 면해주기로 했다.

시장 투명성도 한층 더 높아져야 한다. 신 이사는 “분식회계와 작전세력의 주가조작 등이 사라져야 투자자들이 시장을 신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투신권의 신뢰회복도 과제다. 정의석 굿모닝신한증권 투자분석부장은 “1999년 주식투자 열풍이 불었을 때 투신 및 증권업계가 투자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업계도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변동성 장세 원인은▼

주식은 ‘위험이 크지만 수익성도 높은 투자대상’이라는 것이 경제상식. 각국의 실제 수익률을 분석해보면 주식투자는 예금 채권 부동산 등에 비해 단기적 변동성은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익률이 가장 높다.

그러나 한국의 종합주가지수는 1985년 이후 20여년 동안 대략 500∼1,000의 박스권에서 움직여왔다. 그동안 네 번의 큰 순환이 있었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을 한 것. 한국은 독특한 예외 경우인 셈이다.

주가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주식 투자자들은 매매차익을 얻기가 힘들다. 또 장기투자가 통하기 어렵다. 주가 흐름을 얼마나 잘 타느냐가 승부를 결정짓게 되면서 단기투기가 판을 치게 된다. 아울러 증시 분위기를 주도하는 외국인이나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눈치장세’가 고질병이 된다. 지금까지 한국 증시가 이랬다.

그렇다면 한국 증시는 그동안 발전도, 성장도 하지 못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가 흐름은 실망스러웠지만 한국 증시는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시가총액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꾸준히 불어났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1988∼2001년에 한국 기업이 공모와 유·무상증자로 마련한 자금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7.7%이자 시가총액의 20%였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증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장세다. ‘한국 증시가 기업의 자금조달원이라는 제 역할을 잘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주가가 오르지 못한 이유는? 자금조달원 노릇을 ‘지나치게 잘한 것’이 문제였다. 투자자금의 규모에 비해 주식 공급물량이 너무 빨리 늘어난 것. 1981년에 451개였던 거래종목 수는 2003년 6월 10일 현재 1722개(상장 854개사+등록 868개사)로 늘었다. 주식 수도 1981년 40억여주에서 337억여주로 증가했다.

전통적으로 한국 기업들은 증시에서 돈을 빨아들이기만 했지 ‘주주 대접’에는 소홀했던 것. 투자자들은 매매차익은 물론 배당수익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여기다 한국 증시는 짧은 기간에 천장과 바닥을 오르내리는 변동성이 컸다. 개인투자자들은 이런 장세에서 상투 잡고 쪽박 차기 딱 좋다. 증시전문가들은 증시의 변동이 심한 이유를 한국 경제가 해외여건에 큰 영향을 받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점에서 찾는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 증시를 주도해온 업종은 세계 경기에 가장 민감한 업종들이다. 이러니 수출이 잘 된다 싶으면 주가가 1,000을 넘보고 수출 경기가 꺾일 조짐을 보이면 500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양상이 반복돼 온 것이다.

이 같은 주변여건이 바뀌지 않는 한 주가지수가 ‘변동성 심한 박스권’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증권가는 보고 있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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