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사라진 문화계 얼굴]김기창 정채봉 고운봉 아이작 스턴

  • 입력 2001년 12월 26일 18시 05분


김기창(왼쪽) 장발(오른쪽)
김기창(왼쪽) 장발(오른쪽)
◆ 국내

올해에도 문화 예술계에서 많은 별들이 사라졌다. 2001년이 시작되고 얼마 안되어 미술계에서 큰 별이 졌다. 1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국화의 거목 운보 김기창. 2만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한국화의 1인자이자, 청각 장애를 예술을 통해 뛰어넘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사진작가 임응식은 운보보다 며칠 앞서 89세로 타계했다. 1950년대말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카메라에 담았던 그는 90년대까지 사진현장을 지켜온 우리 사진계의 증인이었다.

서양화가 장발은 4월 100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서울대 미대를 만든 산파역으로 서구 미술교육을 도입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문학계도 손실이 있었다. 성인동화를 개척한 작가 정채봉이 지병인 간암으로 투병하다 1월 55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깊은 울림의 줄거리와 시적인 문체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 초 단편소설 ‘젊은 느티나무’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여성소설가 강신재가 5월 77세로 별세했다. 그는 1950∼60년대 사랑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녀의 심리를 주로 그렸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대목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는 오랫동안 젊은이들을 사로 잡았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인 작가 김학철(본명 홍성걸)이 9월 중국 옌볜에서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편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등을 발표했던 그는 죽음을 예감한 뒤 유언장을 작성하고 곡기를 끊어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민석홍(왼쪽) 조동필 (오른쪽)

학계에서는 서양사학계의 태두인 민석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7월 76세로 타계했다. 그는 프랑스혁명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서양근대사연구’ ‘서양사개론’ ‘프랑스혁명사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경제학자인 조동필 고려대 명예교수는 11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노동자 농민 등 소외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던 그는 ‘협동조합론’ ‘농업정책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치학자인 윤천주 전 문교부장관도 9월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려대 정경대학장, 민주공화당 초대 사무총장, 국회의원, 부산대 총장, 서울대 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문과 현실의 접목’을 시도했던 인물이었다.

박물관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월 66세로 타계했다. ‘곰’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우직함과 특유의 뚝심으로 많은 문화재 발굴 사업에 참여했다. 경부고속철도 경주 도심 통과 철회, 경주 경마장 건설 계획 백지화에도 기여했다.

문호근(왼쪽) 홍연택(오른쪽)

음악계에선 5월, 음악극 연출가 문호근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이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 문익환 목사의 장남으로 오래 재야활동에 몸담았던 그는 민중가요와 연극을 접목시키는 시도했으며 윤이상 작곡 ‘심청’의 한국 초연을 하기도 했다.

지휘자 홍연택도 문호근과 같은 날 숨을 거뒀다. 72년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그는 당시 연주기술로 무리라는 만류를 무릅쓰고 바그너의 ‘방랑하는 화란인’을 과감히 무대에 올리는 등 교향악 위상 및 기술 향상에 공헌했다. 1981년 민간 교향악단인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육성했다.

연극계에서는 배우 고설봉이 9월 88세로 무대 뒤로 사라져갔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당시 한국 연극계의 메카였던 동양극장 산하 ‘청춘좌단’에서 ‘사자수와 낙화암’으로 연극 인생을 시작해 50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한국 연극의 산 증인.

연극 ‘품바’를 제작한 연극연출가 김시라도 2월 56세로 타계했다. 연극 ‘품바’는 낮은 자들의 한(恨)과 힘있는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아내 81년부터 20년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선교와 발레를 결합한 독특한 선교 무용에 일생을 바친 무용가 조승미는 9월 54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10세 때 발레를 시작한 그는 1980년 ‘조승미 발레단’을 창단, 후진 양성과 함께 문화적으로 소외된 이웃을 위한 무료 공연을 펼쳤다. 2000년 2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투병과 함께 발레단 활동을 병행했다.

가요계에서도 황금심과 고운봉 등 큰 별이 사라져갔다. ‘알뜰한 당신’으로 해방 전후 가요계를 풍미했던 황금심은 7월 79세로 별세했다. 34년에 데뷔한 황씨는 ‘울산 아가씨’ ‘뽕따러 가세’ ‘삼다도 소식’ ‘한양낭군’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으며 모두 4000여곡의 노래를 취입했다.

8월에는 ‘선창’의 가수 고운봉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42년 ‘선창’을 발표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서민들의 가슴을 적신 대표 가수. ‘백마야 가자’ ‘명동 블루스’ ‘남강의 추억’ 등으로 40∼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최고 만화가였던 김종래도 1월 73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청나라 상인에게 팔려간 어머니를 찾아나선 어린 아이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만화 ‘엄마찾아 삼만리’로 가난했던 시절 어린이들에게 추억과 낭만을 심어주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해외

아이작 스턴(왼쪽) 조지 해리슨(오른쪽)

해외 문화계에서는 영화배우 앤서니 퀸이 6월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멕시코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길’ ‘희랍인 조르바’ ‘노틀담의 곱추’ 등 1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두 차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룹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은 11월 58세로 숨을 거뒀다. 그는 타계 직전까지 영국의 자택에서 25곡의 비공개 노래를 만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영화감독 스탠리 크레이머는 2월에 88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는 ‘세일즈맨의 죽음’ ‘하이눈’ 등을 제작해 명성을 떨쳤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릴린 먼로와 호흡을 맞췄던 미국 코미디배우 잭 레먼도 6월에 76세를 일기로 은막 뒤편으로 사라졌다.

음악계 인물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가 4월 오페라를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55세로 최후를 맞았다. 사이먼 래틀과 함께 21세기 지휘계를 이끌어갈 거장으로 평가받았던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가졌고 고고학에도 정통한 유럽식 ‘교양인’이었다. 9월에는 ‘음악계의 사마란치’로 불리며 막후 영향력을 행사해 온 ‘바이올린계의 제왕’ 아이작 스턴이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전 세계 유태계 음악인들을 발굴 육성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20세기 최고의 미술사가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른스트 곰브리치도 11월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미술사가이자 유럽 지성계의 표상이었다. 1950년 출간된 ‘서양미술사’는 미술사 책으로 드물게 16판까지 발행돼 전세계에서 600만부나 팔렸다.

50여년동안 프랑스 출판계를 이끌어 온 ‘미뉘 출판사’ 제롬 랭동 회장은 4월 75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사뮈엘 베케트와 클로드 시몽, 60년대 프랑스 문단을 휩쓴 ‘누보로망’(신소설)의 대표작가인 나탈리 사로트를 발굴해 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이면서 철학자이자 교육 개혁가였던 모티머 J. 애들러도 6월 98세로 별세했다.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트참도 6월에 81세를 일기로 팬들 곁을 떠났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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