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국 비자 받기… 기나긴 줄서기[즈위슬랏의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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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많은 한국 사람에겐 필요한, 하지만 나는 안 해도 됐던 경험을 최근 겪었다. 옛날 문체부에 근무했을 때 아침 사무실 가는 길마다 주한 미국대사관을 지났다. 당시는 한국과 미국이 비자 면제협정을 맺기 전이었다. 매일 아침 날씨가 좋건 나쁘건 많은 한국인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비자 면접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들고 있는 서류를 살펴보며 예상 질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불안감과 기대감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약간의 우쭐함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미국에 갈 계획도 없었고 두 번째는 호주 여권 소유자로 호주-미국 비자 면제협정이 있어 비자 없이도 미국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갈 일이 생겨서 알아보니 나는 예외 대상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많은 친구들은 지금까지 내가 미국에 단 한 번밖에 안 갔다는 사실에 놀란다. 1992년 대학 1학년 때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행한 행운권에 뽑혀서 미국 여행 선물을 받았다. 목적지는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스페이스 캠프였다. 우주비행사 가상훈련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어른을 위한 디즈니랜드’ 같다. 여행권 2장이 나와서 친구랑 가기로 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 친구와 달리 나는 멜버른에 있는 미국영사관에 가서 관광 비자를 신청해야 했다.

그때 미국 정부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외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비자 기간보다 오래 미국에 체류하는 것이었다. 나는 1992년 서류심사에 합격했고 2주간 미국 여행을 즐기고 돌아갔다. 그 후로 미국에 안 간 것은 이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항상 못 갈 이유가 있었다. 휴가 때 해외여행을 가면 친척들이 사는 네덜란드나 호주에 간다. 미국은 멀다.

이제 인생에 두 번째로 내년 초 미국에 갈 일이 생겼다! 하지만 나도 옛날 출근길에 봤던 한국인들처럼 비자 서류를 제출하고 인터뷰까지 봐야 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내가 북한을 관광차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북한, 예멘, 수단, 이란, 이라크 등을 방문한 사람은 더 이상 이스타(ESTA) 비자론 미국에 가지 못한다. 보다 긴 서류를 작성하고 대사관 앞에서 줄을 서야 하고 인터뷰를 해야 한다. 옛날에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 한국 사람보다 쉽게 미국과 북한에 갈 수 있었는데, 이제 북한을 방문하면 오히려 미국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가 없게 됐다. 세상은 가끔 아이러니하다. 미국 여행을 하고자 하는 한국 사람들은 인터뷰를 안 해도 갈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나는 인터뷰를 거쳐야 했다.

인터뷰 날 미국대사관 문 앞에 줄을 섰다. 옛날에 비해 줄은 짧았지만 그래도 10분 안팎을 기다려야 했다. 딱 봐서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말고 한두 명밖에 없었다. 창구 앞에서 직원이 인터뷰 확인서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아차, 안 갖고 왔다. 다행히 대사관 직원이 인터뷰 대상자 명단을 갖고 있어서 내 이름을 재빨리 확인하고, 나를 안내해줬다. 2층에 올라가서 큰 대기실 같은 방 안에 있는 접수처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섰다. 접수원이 내 여권을 보고 컴퓨터로 내 파일을 참조한 뒤 3번째 줄로 보냈다. 그 창구 앞에서 또 여권을 건네고 기다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4번째 줄로 보내졌다. 드디어 인터뷰를 보는 마지막 줄에 섰다. 그때서야 알게 된 사실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인터뷰실에 들어가서 앉은 채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고 줄에 서서 창문을 통해 답한다는 것이었다. 10분 후에 마침내 심사원이 나를 불렀다. 인터뷰는 3, 4분 정도 걸렸다. 3일 뒤 비자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여권을 택배로 보낸단다. 인터뷰 시간보다 이 줄 저 줄 오가며 서 있던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오전 8시 반 대사관에서 나올 때 보니 처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네 구역으로 나눠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올 때 기분은 뭐랄까. 마치 맛있는 호떡 하나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선 기분이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비자#미국 대사관#북한#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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