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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부가 ‘성환 만세운동’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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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부가 ‘성환 만세운동’ 지원했다

지명훈 기자 입력 2019-03-28 03:00수정 2019-03-28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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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향토사연구가 임명순씨, 2015년 기고 논문서 밝혀
“등불 제공하고 평화시위 독려”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만세시위 하루 전인1919년 3월 31일 3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열린 충남 천안의 성환 만세운동이 프랑스 신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 속에 이뤄졌다는 연구결과가 발견됐다.

이는 천안의 향토사연구가인 임명순 씨가2015년 ‘천안향토연구’에 기고한 논문 ‘1919년 성환 독립만세운동’에서 밝혀졌다. 임 씨는 잘못 알려진 유 열사의 탄생 연도와 생일, 순국일, 공주지방법원 판결 형량 등을 바로잡았고 유 열사가 항소를 포기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동아일보 1946년 2월 28일자(2, 3면)의공베르 신부(한국명 공안국) 인터뷰 기사를 찾아낸 뒤 이 기사가 성환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규명해냄으로써 사료 부족으로 전모를 알기 어려웠던 이 만세운동을 복원했다.

만세시위 일자와 시간(야간), 천주교 성당및 공소의 위치, 공베르 신부의 근무 일지 등을 찾아내고 분석해 기사에 만세운동 장소로 표기된 ‘천안읍’이 성환면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질서 정연히 진행, 불국인(佛國人) 공안국(孔安國) 신부 담(談)’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외국인이 본 삼일운동’ 기획물의 일부다

논문에 따르면 기존의 성환 만세운동에 대한 사료는 ‘3·1운동 비사’(이병헌 저)와 ‘독립운동사 제3권(삼일운동사 하권)’ 정도다. 비사는 “이날 수천 군중이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도는 한편 일대(일부)는 정거장구내에서 정차 중인 기차를 향해서 만세를 부른즉(불렀더니) 승객 중에서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때 기차 안에서는 일본인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고 내용을 전하고 있다. 독립운동사는 “만세운동에 크게 놀란 일본 경찰과 헌병이 총칼로 제지하고 나섰다”고 기록했다.

임 씨는 기사 발굴을 통해 공베르 신부의 당시 역할을 확인했다. 성환면 우신리의 천주교공소에 기거하던 공베르 신부가 1919년 3월31일 밤 성환 만세운동에 등불 300개를 제공하고 평화적인 시위를 독려했다는 내용이다.기사는 “면장을 비롯하여 읍내 유지들이 나에게 와서 (시위할 때 일본 경찰에) 저항 방법을 묻기에 나는 절대로 평화적으로 하되 금일 밤등불을 있는 대로 들고 나와 질서 있는 시위를 하라고 지도하는 동시에 마침 내가 가지고 있는 등불 삼백여 개를 내어주며 성공하기를 축원하였다”는 공베르 신부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국내 3·1만세시위 가운데 유일한 등불 시위가 일어난 경위가 잘 드러나 있다.

공베르 신부는 “그 시위를 보고 조선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애국적이고 열정적인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다시 인식할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천주교계에서 당시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성론이 이는 가운데 공베르 신부의 활약상이 주목된다.

임 씨는 27일 성환 만세운동에 3000명이나 참여했는데도 기록이 부족한 것은 9명만이 검거되고 이들마저 바로 풀려나 재판기록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안성 본당 소속으로 천안 등지를 관할한 공베르 신부는 독립운동 수배자를 공소로 피신시키고 ‘공소는 프랑스 영토’라며 일경을 저지한 것으로알려져 있다”며 “성환 만세운동 구속자가 적었던 것도 그의 적극적인 보호 덕분이 아닌지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875년 프랑스에서 출생한 공베르 신부는중국 만주로 파견되던 도중 갑작스러운 임지변경으로 한국에 왔다. 1950년 북한군에 체포 돼 압송되는 과정에서 숨졌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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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만세운동#공베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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