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3·1만세운동’ 청년과 학생들이 치밀하게 주도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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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현장/창간 99주년]
태극기와 선언서 분담해서 만들고 비밀유지 위해 감시자 둬 조직관리
‘전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 기록

1976년 동아일보사와 강진군 유지들이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 앞에서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강진군 제공
1976년 동아일보사와 강진군 유지들이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 앞에서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강진군 제공
전남 강진의 3·1만세운동은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1, 2차로 나누어 계획하는 치밀함 때문에 거사를 이룰 수 있었다. 태극기와 선언서를 분담해 만들고 작업 시 경계를 위해 감시자를 두는 등 철저한 조직 관리를 통해 ‘전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1919년 이전부터 강진에선 만세운동의 열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향리(鄕吏)가의 자제들이 보통학교나 외지 유학을 통해 신지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데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해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0일 일본 메이지(明治)대 유학생이자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 멤버였던 김안식이 귀향하면서 운동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안식은 강진읍에 사는 김영수, 김학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규합했다. 민족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은 당시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서와 애국가 가사를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으로 가져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3월 20일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제작됐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1차 시위는 수포로 돌아갔다.

1차 거사가 무산됐지만 만세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차 시위 준비는 이기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거사일은 장날인 4월 4일로 정해졌다. 이기성 등은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군청 뒤 북산에 태극기가 내걸리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이날 정오를 기해 북산에 태극기가 게양되자 장터에는 천둥 치듯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진보통학교 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남문거리에서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군중들은 남문 앞 광장에 집결해 가두행진에 나섰다.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강진경찰서는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장흥에 있는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시위대가 경찰서로 진입하자 지원 나온 병력들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창검이 번득이고 총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열은 흩어졌고 주동자 22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8명은 풀려나고 14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에 참여한 박영옥(당시 21세·여)은 재판정에서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부모 잃은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이 당연하듯 조국을 잃은 내가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냐”며 따졌다. 2차 시위를 주도한 이기성 김현봉 황호경 오승남 등은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상고하며 독립운동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기각당하고 최고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강진에는 3·1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두 곳에 세워져 있다. 하나는 1976년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비다. 동아일보와 강진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위원회가 세운 기념비로 뒷면에 당시 독립만세를 외쳤던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읍 남포마을 입구의 기념비는 4·4만세 시위에 가담한 마을 출신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황호용 강진군 문화원장(76)은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4일 만세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방방곡곡 3·1 그날의 함성#3·1운동 100주년 현장#전남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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