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들]부모님은 매니저 해주시고, 스승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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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나의 부모와 스승 미샤 마이스키

장한나는 “음악이라는 건 정확하다. 그걸 완전히 지켰을 때 거기서 충만한 자유로움이 나오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마음껏 연주했을 때 감동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가 18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경기 성남아트센터에 서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장한나는 “음악이라는 건 정확하다. 그걸 완전히 지켰을 때 거기서 충만한 자유로움이 나오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마음껏 연주했을 때 감동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가 18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경기 성남아트센터에 서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한나 보세요. 아빠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이름 하나 하나를 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한나는 오케스트라 전체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원 각자와 1 대 1로 만나는 거예요. 단원들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다 소중하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아빠는 어김없이 e메일을 보냈다. 15년 전쯤 노트북컴퓨터를 구입한 이래 각국을 돌며 연주 여행을 할 때면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의례다. 국제전화도 매일 한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한 시간. 장한나(30·첼리스트 겸 지휘자)는 세상의 모든 아빠가 이렇듯 자상한 줄 알았다. 2개월가량의 이번 여정 동안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 엄마가 냉동실에 얼려 놓은 음식을 끼니마다 데워 먹어야 한다. 기러기 아빠가 따로 없다. 그럼 엄마는? 항상 장한나의 옆에 있다. 》
○ 동행 30년

공기(空氣). 늘 거기 있는 존재인 줄만 알았고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열한 살에 국제적인 연주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장한나는 부모님의 ‘완전한’ 지원을 받으며 첼로를 했다. 목숨을 걸고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마음 편하게 고생한 것이다. 아무 걱정 없이 자신이 할 일만 충실히 하면 됐다. “마치 온실 속에서 잘 가꿔진 꽃처럼 세상이 다 이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너무 나이브했던 거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가 가슴에 안겨준 첼로를 붙들고 그는 몇 시간이고 방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천재는 곧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등과 협연을 하고 나면 아빠는 연주하는 게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장한나는 “무대에 서는 게 재미있어”라고 했다. 그의 부모는 더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딸을 가르치려는 결심을 했다. 열 살짜리 외동딸을 위해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행을 택했다. “제가 올해 만으로 서른이 돼요. 그런데 엄마는 겨우 서른넷에 열 살배기를 데리고 미국에 가신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깜짝깜짝 놀라요. 죄송한 마음도 있고요.”

엄마 아빠 어느 누구도 그에게 연주가가 되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첼로에 마음을 빼앗긴 딸의 손을 잡고 좋은 연주회가 있으면 데려가고, 훌륭한 연주나 공연실황을 담은 음반 등이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 듣고 볼 수 있게 해줬을 뿐이다. 그러면 딸은 ‘왜 내 첼로 소리는 저렇게 나지 않는 거지?’ 자문하면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다. 그의 부모는 “더 잘해야 한다”는 말조차 한번 하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 그의 부모는 부부간 생이별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닐 때마다 엄마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연습을 끝내고, 연주를 마치고 호텔방에 혼자 있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한 딸이었다. 연습이건 연주건 무섭게 집중하고 빠져드는 그가 기진맥진해서 들어오면 챙겨주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여야 했다. 어떤 때는 리허설 생각에 몰두한 채로 밥을 먹고 나서는 좀 있다 엄마에게 “나 밥 먹었어?”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겁니다. 하하하.”

장한나의 부모는 딸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 재능을 더욱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과감히 희생했다. 그렇다고 그의 경력 관리를 한다고 뭔가 나서서 한 적도 없었다. 묵묵히 그의 뒤에서, 곁에서 동행해 왔다. 다른 부모들이 “어떻게 따님을 저렇게 잘 키우셨나요”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부모에게 정말로 감사하는 일 중 하나는 딸의 능력을 폭발시켜 줄 좋은 스승을 찾는 용기를 냈다는 점이다.

○ 꿈의 눈높이

1992년 10월 1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연주회가 열렸다. 세계 최고의 연주자로 꼽히는 그의 공연은 음악애호가로 만원이었고, 뒤이은 사인회에도 줄은 꼬리를 물었다. 그 속에 장한나의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자신이 사인을 받을 차례가 되자 첼로 거장에게 딸의 연주 실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내밀며 한번 꼭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한 달여 뒤, 마이스키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1993년 8월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한국을 떠난 마이스키 선생님이 다음 연주 여행지에서 시간을 내 제 비디오를 보셨다는 것이 제일 놀랍고 감사해요.”

이듬해 시에나에서 스승을 만난 장한나는 뛸 듯이 좋았다. 출생지인 러시아의 억양이 강하게 밴 마이스키 선생의 영어 발음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했다. 조막만 한 동양 꼬마는 말투는 물론이고 스승의 걸음걸이며 악기를 다루는 자세까지 흉내 내듯 닮아갔다. 그는 장한나를 열한 살짜리 아이가 아니라 서른 살이 된 어른처럼 대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들려줬다. 첼로 연주기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주를 잘하는 사람은 손으로 소리를 내고, 그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머리로 소리를 내지만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소리를 낸다는 그의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장한나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마이스키 선생은 음 하나가 아니라 음악의 세계를 알려주려고 했다. 브람스의 작품을 연습할 때, 그는 장한나에게 거듭 물었다. 브람스가 누군지 아느냐, 왜 그는 이 작품을 썼겠느냐.

“저는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답은 악보에 있으니까 악보를 더 깊이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죠. 평생 음악가로 살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열한 살짜리한테 던지신 거예요.” 열한 살 장한나는 작았지만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높았다. 그의 꿈의 눈높이는 항상 저 위였다. 마이스키 선생은 열한 살 꼬마의 눈높이를 이미 알아본 것이었다. 꿈같은 5주간의 수업이 끝났다.

1994년 장한나가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간다고 하자 스승은 대회 1주일 전 자신의 집으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매일같이 스튜디오에서 시간도 정해놓지 않고 그를 가르쳤다. 대가의 따뜻한 마음씀씀이였다. 경연장으로 향하면서 그는 스승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스승은 말했다. “나중에 커서 너같이 재능 있는 아이를 만나면 그대로 해 주거라. 나도 내 스승들에게서 받은 사랑을 너에게 전해준 것뿐이란다.” 진정한 배움이었다.

○ 10년 기다려주세요

15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는 18일 열리는 ‘장한나와 앱솔루트 클래식 Ⅳ’ 연습이 한창이었다. 오디션을 통해 뽑은 20, 30대 연주자들로 이뤄진 교향악단을 장한나가 지휘하고 있었다. 몇 해 전, 그가 지휘를 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는 음악가예요. 첼로를 하든지 지휘를 하든지 똑같아요. 다이아몬드가 처음부터 완벽한가요? 깎고 다듬어야 보석이 되지요. 문제는 다이아몬드여야 한다는 거죠. 돌을 깎은들 다이아몬드가 되나요? 그게 재능이에요. 재능이 없으면 다듬을 것도 없어요. 10년 기다리세요. 노력한 만큼 됩니다. 하하하.”

그는 자신이 언제나 최고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가 맞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최고의 첼리스트라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잠재력에 비교했을 때 지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지 늘 묻는다. 거장의 반열에 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단발머리에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지휘봉을 손에 쥔 그의 뒷모습을 객석 저 뒤에서 그의 엄마가 지켜보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장한나#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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