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3>이소라

  • Array
  • 입력 2011년 7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마이웨이 디바’ 영혼 울리는 끈끈한 프러포즈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u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un@donga.com
여명기부터 한국 대중음악사는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음악 시장의 문을 열어젖힌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그러했고 트로트라는 최초의 주류 장르를 폭발시킨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이 그러했다. 1960년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스탠더드 팝의 디바 패티김은 여성 뮤지션 역사에 핀 두 송이 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문턱에서 여성 뮤지션 진영은 급격한 퇴조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10대가 주력이 된 시장의 감수성은 이들을 외면했다. 1980년대의 여장부였던 이선희 역시 1990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마지막으로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으며 한영애와 장필순처럼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스타일리스트들은 협소해진 자신의 성 안으로 침잠했다.

1998년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 발매 무렵의 이소라. ‘슬픔’과 ‘분노’로 구분한 이 앨범에서 그는 깊이 있는 느낌의 발라드와 파워풀한 록을 동시에 선보였다. 세이렌 제공
1998년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 발매 무렵의 이소라. ‘슬픔’과 ‘분노’로 구분한 이 앨범에서 그는 깊이 있는 느낌의 발라드와 파워풀한 록을 동시에 선보였다. 세이렌 제공
댄스뮤직의 열광 속에서 룰라나 투투와 같은 혼성 그룹의 일원으로 명맥을 유지해야 했던 여성 뮤지션의 상황은 그러나 1995년 퓨전 보컬 그룹 낯선 사람들 출신의 이소라가 등장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90년대의 팝 프로듀서 김현철의 어시스트를 받은 이소라의 데뷔 앨범은 100만 장에 가까운 엄청난 판매량을 보이며 대중음악은 역시 보컬 중심이라는 본질을 재확인시키는 한편으로 여성 솔로 보컬리스트의 위상을 극적으로 재정립했다. 이소라의 강인하고 점액질적인 보컬의 굴곡은 첨단의 비디오 시대에서도 여전히 음악적 표현력이 중요한 덕목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깨우친 것이다.

이소라는 1996년부터 KBS 2TV에서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5년간 진행했고 올해 4월부터 KBS JOY에서 ‘이소라의 프로포즈 2’를 선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소라는 1996년부터 KBS 2TV에서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5년간 진행했고 올해 4월부터 KBS JOY에서 ‘이소라의 프로포즈 2’를 선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소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TV 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진행자로서, 그리고 심야 프로그램의 DJ로서도 최고의 성가를 올렸지만(이와 같은 진행 능력은 ‘나는 가수다’까지 이어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방송 활동이 그의 음악적 열정과 기조를 훼손하진 않았다. 오히려 앨범 전체의 완성도에 대한 집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높아져 MP3플레이어로 디지털 음원이 기존의 앨범 시장을 붕괴시킨 2000년대에 이르러서도 발표하는 앨범마다 최소한 10만 장 이상을 판매하는, 거의 유일한 여성 앨범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소라는 앨범과 라이브 콘서트라는 두 포맷으로 음악 수용자와 만나겠다는, 저 영광스러운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질풍노도의 딸이다. 그의 노래는 스타 시스템의 위압적인 카리스마로 충만한 스타디움이나 체육관의 것이 아니라 노래의 영혼을 믿는 충성심 높은 고요한 신자들로 이루어진 소극장 혹은 중극장의 것이다. 그가 인천대의 동창생으로 유재하 가요제 2회 그랑프리를 받은 고찬용과 함께 첫발을 디뎠던 낯선 사람들의 데뷔 앨범(1993)에서 “아 이건 TV용으론 긴 쇼”라고 읊조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그저 노래 잘하는 보컬리스트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여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핵심적 동력은 솔로 데뷔작의 성공을 슬기롭게 활용하여 작곡 능력을 갖춘 싱어송라이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앨범부터 자신의 앨범을 총괄적으로 주재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장악력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적 파트너였던 고찬용이나 김현철은 말할 것도 없고 김동률과 나원주, 그리고 이승환(T-Story)과 김민규에 이르는 당대의 싱어송라이터들의 작곡 능력을 자신의 앨범 안에 녹여 내는 한편(이 기나긴 작곡가들의 리스트엔 ‘부활’의 김태원도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시적 감수성이 번뜩이는 노랫말을 그 위에 탑재했다. 그리하여 ‘내 갈 길은 내 맘대로 정’하고 싶은 꿈틀거리는 독립의 욕망으로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일곱 장의 별과 같은 디스코그래피를 완성한 것이다.

데뷔 전 김현철과 듀오로 불렀던 영화 ‘그대안의 블루’의 주제곡이나 데뷔 앨범의 ‘난 행복해’ 정도를 제외하면 이소라에겐 전국을 강타하는 스매시 히트 싱글이 없다. 그러나 ‘나는 가수다’ 무대에서 보여주었듯이 그의 앨범엔 ‘바람이 분다’(2004년 6집)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2002년 5집) ‘믿음’(1998년 3집) 같은 주옥의 음악 편지들이 즐비하다.

그의 노래에 장르의 라벨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멍청한 짓이 될 것이다. 짙고 깊은 호흡과 그 사이로 팽팽하게 긴장된 여백은 마치 용광로처럼 모든 장르를 녹여 이소라만의 스타일로 되살아난다. 그의 노래들은 그가 소망했던 헬렌 메릴이나 세라 본 같은 전설적인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자아냈던 울림에 닿아 있다.

이소라는 남자들이 지배해온 대중음악계에서 시장의 소모전에 희생되는 것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아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 철학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