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이남호/소설「검은 이야기 사슬」

  • 입력 1999년 4월 16일 19시 58분


‘검은 이야기 사슬’은 정영문(34)의 첫번째 소설집이다.

이 책 속에는 45편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어떤 것들은 서사가 전혀 없이 짧은 생각만으로 되어 있어, 소설도 이야기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소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정영문이 구사하는 언어는, 전통적인 소설에서는 만나기 힘든 인상적인 환상과 관념을 보여준다.

정영문이 꿈꾸는 환상은 아주 독특하다. ‘회오리바람’에서는 작은 회오리바람을 병에 넣어 키운다. ‘장의사’에서는 밤중에 장의사가 나타나서 자신에게 수의를 입히고 나귀에 태워 저승으로 간다.

‘블랙홀’에서는 자신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한없이 올라가 대기권을 벗어나고 마침내 불랙홀에 빨려들어간다. ‘미친 코끼리’에서는 골목에서 달려드는 코끼리를 만나며, ‘안락사’에서는 굶주린 사자를 이용한 안락사 방법이 나온다. 기발한 환상을 통해 정영문은 존재의 불안한 심연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그의 언어와 사유 역시 독특하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모든 것들은 공중을 기어다닐 뿐’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는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세계를 나의 관념 위에 올려 놓은 채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 ‘비는 숲이 분비하는 관념이었고, 나는 그 비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언어는 기하학적이다. 그러나 그가 건조하게 그려내는 언어의 도형 속에는, 존재의 고독과 허무가 흥건하게 고여 있다.

‘검은 이야기 사슬’은 한 개성있는 신인 작가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그의 독특한 환상과 언어는, 개성다운 개성을 만나기어려운 우리 문단에서 반갑고 신선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남호<고려대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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