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식의 스포츠&]스포츠계 ‘구타 미투’가 번진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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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야구 팬 커뮤니티에 올랐던 국내 한 프로야구 팀 선수들이 ‘원산폭격’이라고 부르는 얼차려를 받는 모습.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3년 전 야구 팬 커뮤니티에 올랐던 국내 한 프로야구 팀 선수들이 ‘원산폭격’이라고 부르는 얼차려를 받는 모습.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초중고교 선수 시절 내내 맞으면서 운동해서 그런지 작전타임 때 감독 선생님한테 따귀 한 대 맞았더니 슛이 잘 들어가던데요.”

10여 년 전 남자 대학농구 우승팀 선수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필자는 당시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창 시절 단체 기합의 끔찍한 기억이 뭉툭해져 추억으로 변한 중장년층 대부분이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빙상경기연맹 특정감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쇼트트랙 남자 코치(조재범)가 여자 선수(심석희)를 밀폐된 공간에서 발과 주먹으로 수십 차례 때렸는데, 그 이유가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단다. 엘리트 스포츠계의 구타가 이토록 심각한 줄은 몰랐다. 그동안 태극전사들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낸 뒤 흘린 것이 ‘피눈물’이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 현장의 구타 실태에 대한 전문가의 진단에 또 한 번 놀랐다. ‘스포츠, 인권을 만나다’를 공동 저술한 정용철 교수(서강대 교육대학원)는 “학교 엘리트 운동부, 국가대표팀 내에서의 구타와 폭언은 여전하다. 충격적인 것은 국내 프로 스포츠팀 내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석희, 구타 피해 사건’과 고교 재학 시절 후배들을 집단 폭행한 프로야구 넥센 신인 투수 안우진(19)이 대표적인 예다. 만약 스포츠계에서 ‘구타 미투(#MeToo·나도 구타당했다)’가 본격적으로 촉발된다면 어찌 될까. 피의자와 피해자가 조사를 받기 위해 줄소환되면 정상적인 대회 진행이나 리그 운영이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 교수는 “구타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선수나 후배를 이끄는 방법을 알지 못해 추악한 구타가 대물림되고 있다. 각 협회나 연맹이 지도자 교육 등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밝혔다.

경기력을 향상시키려면 체계적인 훈련과 풍부한 실전 경험, 간절함 등 삼박자가 어우러져야 한다. ‘팀워크를 강화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구타는 필요악’이라는 인식은 어불성설이다. 이유 불문하고 폭력은 그 자체가 범죄다.

그런데 간절함은 선수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조금 생뚱맞을지 몰라도 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 대표팀 1.5군의 간절함을 예로 들어보자. F조 조별리그에서 한국과 독일은 마지막 세 번째 경기에서 맞대결을 벌인다. 혹자는 독일이 앞선 두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면 한국과의 경기에는 주전 선수 부상 방지를 위해 1.5군을 대거 출전시킬 테니 한국팀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 대표팀 관계자들은 “독일의 1.5군이 1군보다 더 위협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월드컵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절호의 기회를 잡은 1.5군은 1군보다 이를 악물고 뛸 것이 뻔하단다. 이래저래 한국 축구대표팀의 전망은 밝지 못하다.

세상사 대부분이 승자 독식이다. 특히 스포츠는 그렇다. 스포트라이트는 승자의 몫이다. ‘아름다운 꼴찌’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은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

“난 수영이 좋은데 꼭 1등만 해야 해요?”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영화 ‘4등’에서 열두 살 수영선수 준호가 한 말이다. 훈련 중 구타를 일삼는 코치, 이를 눈감는 부모의 모습은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잠깐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그런데 ‘심석희 사건’ 등을 계기로 국민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방법이 정당했고 과정이 공정했는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 맞으면서 획득한 메달을 마냥 기뻐할 국민은 없을 듯하다. ‘묻지 마 메달’은 더 이상 선수는 물론이고 국민에게도 기쁨이 될 수 없다.

칼럼 한두 편으로, 캠페인 몇 번으로 구타의 악순환이 단숨에 끊어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 개발독재 산업화시대에서 비롯된 성과 지상주의는 스포츠계도 그 뿌리가 깊다. 게다가 스포츠계의 상명하복은 어느 분야 못지않다.

대한민국은 메달 개수로는 스포츠 강국이지만 결코 스포츠 선진국은 아니다. 시스템이 취약하고 구타 등 시대착오적인 요소도 많다. 스포츠 관계자 모두의 깊은 반성과 뼈를 깎는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 세대쯤 지나면 바뀌어 있을까.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난다. 훗날 국제대회 시상대에 오른 태극전사가 만약 눈물을 흘린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기뻐서’였으면 좋겠다.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ysahn@donga.com
#원산폭격#스포츠#구타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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