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비(碑)의 의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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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비(碑)의 의미 ―이승하(1960∼)

내가 다스릴 땅을 보고 싶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일굴 땅과 고기 잡을 강
집을 세울 터전을 둘러보고 싶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여기에 나라를 세우는 동안
얼마나 많은 조상이 피를 흘렸던가
가야를 완전히 병합하는 동안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함경도 해안지방으로 진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렸던가

구구절절 시시콜콜 돌에다 새겨
오래오래 전하고 싶었다 백성들아
“진흥대왕과 중신이
순수관경(巡狩管境) 했을 때 세웠다”로 시작하는
이 비에 새긴 글의 뜻을 알아다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죽어
뼈와 머리카락 다 삭아 흙이 될지라도

비의 의미를 아는가
이 땅에서 자식 낳아 잘 기르고
논밭 일궈 배불리 먹여
서로 싸우는 일 없이 자손만대
평화롭게,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내가 넓힌 땅을 보고 싶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일굴 땅과 고기 잡을 강
꿈을 키울 산천을 돌아보고 싶었다


오냐. 내 품 안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날개를 치거라 하고 서울을 감싸 안고 굽어보는 북한산에 오르면 거기 돌비를 이고 있던 비봉(碑峰)이 있다. 거기 오랜 바람과 비에 닳고 깎인 위에 이끼를 덮고 있어 글자가 지워진 몰자비(沒字碑)라고도 불렸던 돌이 하나 서 있었다.

그 두 동강 나고 볼품없는 다섯 자 키의 돌덩이에서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로 이름과 위엄을 찾아낸 이는 일찍이 실사구시(實事求是) 금석학에 눈을 뜬 김정희였다.

1816년 서른 살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승가사에 갔다가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고 이듬해 6월 8일 다시 친구 조인영과 68자를 심정(審定)하여 역사의 한 축을 살려내었다.

순수비는 임금이 새로이 영토를 넓히거나 국토를 순례할 때 세우는 것. 신라 24대 진흥왕이 고구려 백제와 다투던 한강 유역을 정복한 기념비를 세운 것인데, ‘삼국사기’에 진흥왕 16년(555년) 북한산을 순시하였다는 기록에 미루어 그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풍마우세(風磨雨洗)를 더 감당하기 어려워 보여 비석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다 놓았다. 시인은 ‘내가 넓힌 땅을 보고 싶었다’며 짐짓 나라님 되어 백성들을 굽어 살핀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비의 의미#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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