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쁘띠거니’와 낸시 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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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 ‘버락 오바마’
낸시랭 ‘버락 오바마’
‘쁘띠거니’는 ‘작은’ ‘귀여운’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쁘띠(petit·프티)’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뜻하는 거니(건희)를 합친 조어다. 이 회장의 다양한 캡처 사진을 모은 ‘쁘띠거니 시리즈’는 5, 6년 전 인터넷에 등장한 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속 이 회장은 위엄 있는 재벌 회장이라기보다는 다소 코믹하고 귀여운 할아버지 같다. 예컨대 아랫배가 부각된 사진에는 ‘배 나온 거니’, 배우 신민아와 닮아 보이는 사진에는 ‘신민아 닮은 거니’ 식의 유머러스한 제목이 붙어 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정도가 클수록 누리꾼들은 환호한다.

최근 팝 아티스트 낸시 랭(본명 박혜령)의 그림 한 점이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제목은 ‘쁘띠거니’. 이 회장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 이 회장의 어깨에는 낸시 랭의 분신이라고 하는 고양이 인형 ‘코코샤넬’이 얹혀 있다.

낸시 랭은 지난 대선 기간에 역대 대통령과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당시 대선 후보군을 비슷한 방식으로 그려 전시회를 가졌다. 3월 새로 열리는 전시회에는 이 회장뿐 아니라 버락 오바마(사진), 마이클 잭슨, 스티브 잡스, 워런 버핏, 후진타오 등 세계 유명인의 초상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그중에서도 쁘띠거니는 유독 많은 관심을 받는다. 낸시 랭은 “다소 심각하고 진중한 인사들을 유쾌하게 풍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림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귀엽다” “재치 있다”는 긍정적 평가부터 “인기 도구로 유명인을 이용한다” “풍자의 수준이 낮다”는 지적도 있다. 이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가 관장으로 있는 미술관 리움이 쁘띠거니를 소장할 것이라는 농담이 도는가 하면, 어깨에 얹힌 고양이가 악마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림을 그린 낸시 랭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눈에 띈다. 한쪽에선 “튀려고만 하는 ‘개념 없는 여자’”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선 “거대 재벌 총수를 풍자하는 ‘용기 있는 여자’”라고 칭찬한다. “고도의 정치 9단의 감각을 가진 작가”라는 말도 나온다. 예컨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낸시 랭의 이건희 풍자화? 본인이 어떻게 해야 먹고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재벌을 싫어하는) 친노종북과 (삼성과 상속 소송 중인) CJ그룹의 마지막 희망이 될 거다”라고 말했다.

쁘띠거니에 대한 감상이 이처럼 극단적인 것은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 회장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쁘띠거니를 친근하게, 혹은 조롱 섞인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낸시 랭과 예술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서 그 해석의 여지가 더 넓어진 셈이다.

팝 아티스트인 강영민은 쁘띠거니가 화제가 되자 페이스북에 “미술 논쟁은 상상력을 키우지만 정치 논쟁은 상상력을 가둔다”면서 “정치 가지고 진영 싸움 하는 것보다 미술작품 감상하며 떠드는 게 훨씬 낫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낸시 랭과 쁘띠거니는 누리꾼의 상상력을 신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원래 의도가 어찌 됐건 간에.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쁘띠거니#낸시 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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