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훈상]서훈 국정원장은 자신이 한 말을 잊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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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상 정치부 기자
박훈상 정치부 기자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정보원에서 북한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는 직원들이 괴로워한다.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북한이 불안하고 위협적인 요소라고 분석했다. 지금은 장기적으로 대화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는 취지로 작성해야 한다.”

한 공안당국 관계자가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다. 국정원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생산한다는 의심은 기우일 수 있다. 하지만 정권교체 이후 이 같은 우려는 있었다. 시작은 지난해 5월 29일 서훈 국정원장의 국회 정보위원회 인사청문회 때였다.

당시 국민의당(현 바른미래당) 이태규 의원은 서 원장의 2016년 4월 강연 내용을 문제 삼았다. 서 원장이 “아버지 김정일 때에 비해 김정은이 굉장히 폭넓은 경제개선 조치를 취하고 있다. 북한의 변화를 두 마디로 정리하면 자율화와 분권화”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 의원은 “(서 원장이) 북한의 김정은 체제 이후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의미 부여를 했다. 이는 제가 정보위에 있으면서 그동안 국정원으로부터 보고받은 기조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2007년 제1,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서 원장이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서 원장은 북한의 국정원장격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방한 기간 때 대화 파트너였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만나는 자리에도 배석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서 원장이 명심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북한과 대화하는 국정원의 사명이 그것이다. 남북 채널을 담당하는 대북 협상가이기 전에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대공기관 수장이다. 서 원장도 인사청문회에서 “남북관계나 남북회담은 기본적으로 통일부의 책무”라고 했었다.

과거부터 남북 대화는 정보기관이 주도했고, 그래서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정권 차원의 국정 동력을 얻기 위해 남북 간에 뒷거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일부는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초대 국정원장인 이종찬 전 원장도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남북 대화를 지켜본 뒤 언론 인터뷰에서 “정보기관장이 왜 나서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많고, 그런 부담을 안고 갈 필요가 있겠는가. 정보기관은 뒷받침해 주고 앞서서 가는 사람을 하나 선택하면 어떤가”라고 조언했다.

서 원장이 남북 관계에 다걸기(올인)하면서 국정원 내부 개혁이 지체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정치권 일각의 비판도 있다. 국정원은 정권 교체 직후부터 성역이던 내부 컴퓨터 서버까지 국정원 개혁위원들에게 공개하고,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도왔다. 반면 내부 개혁은 더디다. 자체 개혁안만 던져 놓은 국정원의 개혁 의지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복수의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의 냉정한 평가다. 정치권에선 “서 원장이 조직에 칼을 대는 개혁을 피하고 남북 대화에 공을 세워 훗날을 도모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비공개를 포함해 7시간 가까이 진행된 서 원장의 청문회에서 그는 몇몇 질문에는 분명한 답을 못해 이리저리 부연 설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똑 부러지게 말한 대목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정보기관장이 청문회를 통과하게 되면 국민들의 관심에서 사라져야 되는 직책이다. 동의하느냐”고 묻자 “네”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때 그는 “이제는 국민들로부터 잊혀진 기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게 제 소망”이라고도 했다. 지금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서 원장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박훈상 정치부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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