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기획이 과하면 혁신이 죽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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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실패하라’ 실리콘밸리 구호… 기획으로 시간 낭비 말고
작은 시도로 축적 속도 높이라는 것… R&D 예비타당성 평가는 형용모순
우리 산업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손바닥에 부드럽게 쥐어지는 최신 스마트폰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알맞은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싶을 때가 있다. 혹자는 농담 삼아 화성인에게 스마트폰의 기능을 알려주고 디자인하라고 해도 딱 이렇게 만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레이먼드 로위(1893∼1986)는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세계를 연 대표적인 개척자다. 어느 날 경쟁사가 로위의 디자인을 베껴 법정에 선 그는 당사자로 증언했다. 경쟁사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려면 그렇게 디자인할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쉽게 말해 볼링공을 디자인하는데 둥근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로위는 증인석에서 10분 만에 25가지 다른 디자인을 스케치해 보였다. 이 일화는 혁신적 제품의 정의나 구현 방법에는 정해진 답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술 혁신은 근시안적으로 이곳저곳을 더듬어 정보를 얻고, 경험을 조금씩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하향식이 아니라 전형적인 상향식 과정이다. 숨겨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없는 답을 만들어 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혁신이 잘 일어나려면 탐색의 누적횟수, 즉 탐색을 많이 하고, 꼼꼼히 기록해 축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당연히 여러 번 탐색하려면 매번 탐색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적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상징하는 ‘빨리 실패하라(fail fast)’는 구호의 의미도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이 구호는 실패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단 스케치에 불과해도 작은 시도를 재빨리 많이 해서 축적의 속도를 높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리콘밸리 기업에서는 파일럿 프로젝트가 많고, 매일 프로젝트 중간점검 발표가 공개적으로 회사 곳곳에서 열린다.

최근 글로벌 기술 챔피언 기업들은 산업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너럴일렉트릭(GE)은 2015년 프레딕스(Predix)라는 빅데이터 플랫폼을 전면 공개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관련 기업들을 연결했다. GE가 자랑하는 발전용 터빈만 해도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의 기업에서 일어나는 작은 경험들을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인공지능으로 패턴을 분석해 설계도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로위가 법정에서 순식간에 25가지 다른 디자인을 그려낸 것은 놀라운 능력이지만 전 세계 곳곳의 방대한 경험을 실시간으로 쌓는 빅데이터와 비교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 산업계는 지금 반대로 가고 있다. 경기가 어려워 혁신에 쓸 자원이 부족하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니 더 신중해진다. 철저한 선택과 집중으로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이 대단하다. 그래서 사전 기획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공공부문은 더하다. 국가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평가라는 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혁신기술을 목표로 도전하는 마당에 향후 10년 이상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개발 방법을 신중히 선택해, 자원을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획하라고 요구한다. 투자 대비 편익이 충분히 큰지를 평가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백 페이지의 기획보고서를 제출하고, 반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신중히 평가한다. 이 기획보고서를 보기 좋게 만들어주는 기업이 수십 군데 성업 중이다. 혁신은 유일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구개발에 대한 예비타당성평가는 둥근 네모처럼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이제 진정 혁신을 하겠다면, 기획과 예측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확 줄여야 한다. 기획보고서도 몇 페이지로 줄여야 한다. 각 시행의 투자규모를 극적으로 줄여 부담 없이 빠르게, 그러나 꾸준히 시도하고, 경험을 쌓는 관행을 정립해야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스템을 적극 도입해서 축적의 시간을 단축하고, 글로벌 빅데이터 플랫폼에는 손들고 얼른 참여해야 한다. 작게, 빠르게, 많이 시행하고, 꾸준히, 기록하는 것이 혁신기업의 비밀이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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