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소비자 심리를 만족시키는 밥솥 뚜껑의 주걱 거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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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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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양판점 계산대에 활용된 광고판 디자인. 계산이 끝난 물품을 점원이 밀어 놓는 공간바닥을 광고면으로 활용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점이 신선하다.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미국의 한 양판점 계산대에 활용된 광고판 디자인. 계산이 끝난 물품을 점원이 밀어 놓는 공간바닥을 광고면으로 활용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점이 신선하다.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디자인에 문화인류학자가 참여한다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분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독특한 인테리어로 유명한 구글 본사의 디자인에도 인류학자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그들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사용하는 참여관찰(participatory observation)법이 디자인 개발에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참여관찰은 한 집단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참여해 밀착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디자이너들의 주요한 방법론의 하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참여관찰을 통해 밝혀진 소비자들의 행동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그대로 새 상품 개발이나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가 된다.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인재들이 취직하고 싶어 안달하는 디자인회사 ‘아이데오(IDEO)’에서 정리한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행동에서 무수한 디자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사람들은 기둥같이 무언가 자신을 감추거나 기댈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기둥이 마땅치 않을 때는 작은 작대기 뒤에라도 서 있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지하철을 타면 손잡이를 두 개씩 겹쳐 잡고 싶을 때가 있고 추우면 손을 다리 사이에 끼운다. 페인트 가게에서는 커다란 페인트 통을 비스듬히 눕혀 바닥을 굴리며 나른다. 이런 점에 착안해 두 발을 함께 넣는 야영용 양말이 개발되고 무거운 플라스틱 페인트 통의 바닥에는 반드시 턱을 만들어 굴리기 쉽게 만들어 놓는다.

일본의 세계적 디자이너 사사키 마사토(佐佐木正人) 역시 참여관찰을 통해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가 디자인한 램프는 아래에 자그마한 접시가 달려 있다. 외출에서 돌아온 사용자가 시계, 휴대전화, 지갑, 자동차 열쇠 등을 놓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누구나 외출하려는 순간 자동차 열쇠나 휴대전화를 못 찾아 소란을 떨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별 의식 없이 하는 습관화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램프 밑에 접시가 있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스위치의 작동 방향이다. 통상적인 램프는 스위치를 올리면 켜지고 내리면 꺼진다. 그러나 사사키가 디자인한 램프는 내리면 켜지고 올리면 꺼진다. 내린다는 행위가 스위치 하단 방향의 접시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행위와 연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외출할 때는 램프 접시에 있는 지갑이나 열쇠 등을 집어 챙기며 스위치를 올려 램프를 끈다. 램프를 켜 두고 외출하는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참여관찰을 통해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관련된 행동들을 패키지로 묶어버리는 해결책을 동시에 찾아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밥솥 뚜껑 디자인이다. 필자도 집에서 가끔 밥을 푼다. 밥을 식구 수대로 푸고 난 다음이 문제다. 주걱을 놓을 곳이 마땅치 않다. 누군가 밥을 더 먹을 수도 있으므로 싱크대에 담아버릴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새 그릇을 꺼내 주걱을 놓곤 한다. 그러나 설거지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이렇게 설거지감을 늘리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를…. 일본의 산업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는 전기밥솥의 뚜껑에 주걱 거치대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밥솥의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고 상단에 5mm 정도 높이의 가로 턱을 디자인한 것이다. 이 간단한 변형으로 주부들의 골칫거리 하나가 사라졌다.

참여관찰은 제품의 개발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에서는 광고를 보는 소비자들의 정보처리 방식이나 판매 시점에서의 행동방식의 특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줄 수 있다. 예컨대 일전에 미국 여행 중 양판점 카운터에서 재미있는 광고면을 본 적이 있다. 계산이 끝난 물품을 점원이 밀어 놓는 공간의 바닥을 광고면으로 활용한 것이다. 점원이 계산을 하는 동안 소비자들의 어색한 시선이 머무는 곳이 그곳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좋은 신문기사를 칭송할 때 “발로 쓴 기사”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참여관찰이라고 거창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는 “현장에 자주 가 보라”는 디자인계의 오랜 경구와 다르지 않다. 사용자 속에 깊이 그리고 자주 다가갈수록 새로운 아이디어는 샘솟을 것이다. 디자인에서도 발품을 팔아야 제대로 된 것이 나온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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