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희망이 「문턱」까지 왔구나!』

  • 입력 1998년 11월 19일 19시 05분


《날벼락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은지 1년.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도가 밀어닥쳤다. 1년동안 IMF 파고를 힘겹게 헤쳐온 중소기업인 자영업자 금융인 문화예술인 교육자 스포츠선수의 체험과 제언을 들었다.》

▼ 김기문(㈜로만손 사장) ▼

작년 11월 바이어 상담과 시장조사를 위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모스크바와 취리히로 출장을 떠났다.

귀국 하루전. 취리히에서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받기로 결정했다는 CNN 뉴스를 들었다. 12월초 귀국한 직후부터 기업 연쇄도산, 내수급랭, 자금난 등을 목격하며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주한 오더 선적, 비상운영 자금확보, 불안과 회의에 빠진 직원들의 정신무장 등 화급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해외바이어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나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한국의 경제 실상을 솔직히 알렸다. 수출 우수업체인 덕에 6개월 이상의 운영자금 확보가 가능했다.

임직원이 힘을 합해 꽁꽁 얼어붙은 내수시장 확대에 도전했다. 헌 시계를 보상하는 판매기획을 실시하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 브랜드 디자인을 바꿨다. 직원들의 출장팀을 3개팀으로 늘렸다. 인도 중남미 등 IMF의 영향이 적은 지역을 집중 공략했다.

그러기를 1년. 인도에서는 로만손시계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IMF 위기가 로만손의 호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 오명호(제일은행 신청담지점장) ▼

김박사는 성실한 의사로 덕망이 높던 분이라 선뜻 대출을 해주었다. 새 봄이 오던 3월에 그가 자살을 했다. 9층 건물을 지어 병원이 입주하고 나머지 층을 임대 분양해 공사대금을 갚으려던 계획이 IMF 사태로 부동산 경기가 침몰하면서 무산돼버렸다. 빚독촉에 시달리다 세상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IMF 이후 1년. 함께 근무했던 많은 동료, 선후배 직원들이 구조조정으로 정든 직장을 떠났다. 빈자리를 쳐다볼 때마다 ‘왜 내가 나가야 하느냐’고 호소하던 얼굴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리다.

거래업체 중에는 20년 넘게 수출만 하다가 IMF 이후 오히려 호황을 누리는 중소기업도 있다.

며칠 전 결혼 23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영화를 봤다. 샌드라 불럭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랑이 다시 올 때’라는 영화였다. 아이들이 개미집을 부숴 버리면 개미들은 멈추지 않고 개미집을 복구했다. 평범한 대사 하나가 오래도록 인상에 남았다.

“개미들이 부서진 집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은 가족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마라. 사랑으로 충만하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 윤웅섭(서울 윤중중학교 교장) ▼

제때 납입금을 내지 못하거나 면제를 신청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중식 지원을 희망하는 학생도 많아졌다. 갑자기 시골로 전학을 가는 학생도 생겨난다. 가슴 아픈 일들이다.

교사들 중에는 승용차를 처분하거나 담배를 끊는 사람도 있다.

IMF사태 이후 일선 초중고교에서는 소비성 경비를 중심으로 각종 운영 예산이 깎이고 교실 선진화 같은 주요 사업이 중단되고 있다.

어찌 그뿐인가. 교원들은 정년단축 문제로 사기가 한껏 침체돼 있다.

이런 IMF 사태의 와중에서도 절약의 미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교내 분실물 센터에서 자기 물건을 찾아가는 학생이 늘고 외제 학용품을 쓰는 학생이 줄어들었다. 교복 체육복 물려주기 운동이 옛날보다 크게 확산되고 있다.

IMF체제는 분명히 가혹한 시련이지만 배우는 학생들에게 한국인들이 잃어가고 있던 덕목, 즉 근면과 절약의 정신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했다.

IMF체제 1년을 맞아 아무리 어렵더라도 배움을 중단하는 학생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다짐해본다.

▼ 최진실(연예인) ▼

IMF사태 초기에는 설마 나에게까지 큰 영향이 오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터지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일년이면 7,8편씩 들어오던 영화 출연 제의가 절반으로 줄었다. CF 모델료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절반 가까이 깎였다.

기아 자동차를 돕는 차원에서 무료로 CF에 출연한 뒤부터는 가끔 내가 먼저 CF 개런티를 낮춰 제안하기도 한다.

영화사 방송사도 IMF 한파를 심하게 타고 있다. 1년에 60편 안팎을 제작되던 방화가 30편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연기자들도 그만큼 출연 기회를 잃어버렸다. 촬영 현장에서 자주 만나던 스태프들 중에도 일거리가 없어 실업자가 된 사람이 많다. 영화가 좋아 박봉에도 밤을 새며 일에 매달리던 동료들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

나는 원래 ‘짠순이’로 연예계에서 소문이 파다한 편이다. IMF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덜 쓰는 것이다. 나는 한국통신의 CF에서도 ‘대한민국 짠순이에서 이제 세계적인 짠순이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짠순이가 되면 소비가 위축돼 경기가 살아나기 어렵다고 하니 이제 꼭 써야 할 곳에는 써 볼 생각이다.

▼ 김기태(프로야구선수) ▼

작년말 포수 박경완이 프로야구 사상 최고액인 9억원을 받고 현대로 트레이드됐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언론에선 나의 일본 진출설을 일제히 보도했다. 쌍방울이 선수들을 팔아서 그 몸값으로 운영자금을 조달하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에 굴복한 구단은 나의 트레이드를 백지화했다. 대신 2군 선수들이 줄줄이 퇴출당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쌍방울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원정 숙소는 3급 호텔로 바뀌었다. 반찬 수가 줄어들고 식사의 질도 떨어졌다. 광주와 대전 경기는 전주에서 출퇴근을 하며 치렀다. 5켤레가 나오던 신발이 3켤레로 줄어들었다. 2군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시즌초 연봉이 제때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성적에 따른 보너스는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김성근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시즌 중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했다.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구단도 선수단 헬멧에 외부광고를 유치하는 등 운영자금 조달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다.

▼ 김보근(골프용품 전문점 운영) ▼

골프용품 업소들은 IMF사태 직후 꽁꽁 얼어붙었다.

조금씩 대중화 바람을 타던 시기에 IMF사태가 몰아닥치면서 ‘골프친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힘든 상황이 시작됐다.

IMF사태 이후 올 상반기까지 한달 평균 매출이 작년에 비해 80%가 줄었다.

주변의 중소 골프용품 수입업체들이 속속 쓰러졌다. 나도 부도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맞았다. 업종전환을 생각해보았지만 그나마 몇년동안 들인 공이 아까웠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환차손 때문에 올렸던 판매가격을 IMF사태 이전 가격보다 더 내렸다. 직접 골프채 수입에 나서 수입원가에다 최소한의 마진만을 붙여 판매했다.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은 골프숍을 인수해 안산과 수원에 매장을 두개 더 열었다. 주변에서는 ‘지금 시기에 골프 가게를 확장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렸다. 그러나 공격 경영이 IMF사태를 뚫는 비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반기들어 매출이 작년 대비 60%선까지 올라갔고 최근에는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하면 IMF 한파에도 살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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