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이준식의 한시 한 수]〈42〉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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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은 횡당에 있는데요. 붉은 비단 휘장에 계수 향 가득하답니다.”/구름처럼 풍성하게 쪽 찐 머리, 밝은 달처럼 둥그런 귀고리./연꽃이 바람에 일렁일 때 강변에 넘실대는 봄기운./둑 위에 서서 북방 사내를 붙잡는다./“낭군은 잉어꼬리 드셔요. 전 오랑우탄 입술을 먹을래요./양양 가는 길 가리키지 마세요. 푸르른 포구엔 돌아가는 배 드물답니다./오늘은 창포꽃이 저리 곱지만, 내일이면 단풍처럼 지고 말걸요.”(妾家住橫塘, 紅紗滿桂香. 靑雲敎관頭上(결,계), 明月與作耳邊당. 蓮風起. 江畔春. 大堤上, 留北人. 郎食鯉魚尾, 妾食猩猩脣. 莫指襄陽道, 綠浦歸帆少. 今日菖蒲花, 明朝楓樹老.) ―‘제방의 노래(대제곡·大堤曲)’(이하·李賀·790∼816)

남방의 포구 마을, 한 북방 사내에게 말을 건네는 기녀의 차림이 유별나다. 쪽머리는 구름처럼 한껏 말아 올렸고 귀걸이는 달처럼 둥글게 반짝인다. 바람에 하늘대는 연꽃 가득한 봄날의 강변. 그대가 원하신다면 진귀한 잉어꼬리탕이며 오랑우탄 입술 요리도 같이 먹어요. 돌아갈 배편을 알아볼 생각일랑 아예 마세요. 여인의 간곡한 유혹을 사내가 냉정하게 외면할 수 있었을까. 유한한 인생, 오늘 이 어여쁜 창포꽃 놓치고 나면 금방 단풍 지듯 시들어 버릴걸요. 은밀한 속삭임에 더하여 대담하게 훈계까지 곁들였다. 사내의 속내가 궁금하다. 이 다정다감한 접근을 교묘한 상술(商術)로 치부했을까. 꿈꾸어 왔던 일탈을 상상하며 짐짓 마음의 빗장을 풀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도타워질 정분이 두려워 고지식한 선비의 뚝심으로 기어이 돌아서고 말았을까.

‘대제곡’은 주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민요풍의 노래로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여럿 전해진다. 민요답게 글자 수도 들쑥날쑥 자유롭고 상황 묘사와 대화의 경계마저 모호하다. 이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던 시인. 신선이나 귀신 세계 등 생뚱맞은 소재도 곧잘 다루었기에 시귀(詩鬼)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제방의 노래#대제곡#이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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