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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만 27개월? 공주 정지산 ‘무령왕비 빈소’의 비밀 [김상운 기자의 발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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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만 27개월? 공주 정지산 ‘무령왕비 빈소’의 비밀 [김상운 기자의 발굴왕]

김상운 기자 입력 2019-11-18 16:57수정 2019-11-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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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대한민국 최초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흥미로운 고고학 이야기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 당시 전경. 오른쪽 중간 유적이 기와 건물터다. 문화재청 제공


●정지산 유적 ‘빈전설’을 둘러싼 논란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굴 이듬해인 1997년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했습니다. 학계는 전례 없이 파격적인 해석에 찬반으로 엇갈려 논란을 벌였습니다. 공주 공산성을 오랫동안 발굴한 이남석 공주대 교수는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제사 유적은 분명하지만 빈전으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몽촌토성을 발굴한 박순발 충남대 교수와 김길식 용인대 교수는 빈전설을 지지했습니다. 그해 KBS에서 정지산 유적을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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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대 교수와 니시타니 타다시(西谷正) 규슈대 교수 등 일본학계 일각에서도 빈전설을 지지했습니다. 일본학계는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壁)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닮은 점에 주목했습니다. 대벽건물은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체를 세운 것입니다. 고대 대벽건물은 주로 귀족들의 저택으로 이용됐는데 백제, 왜와 더불어 가야 유적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교수는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고고학계는 정지산 발굴조사가 빈례에 대한 역사기록을 유물과 유적을 통해 처음 확인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합니다. 빈례에 대해서는 중국사서와 더불어 광개토왕릉비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 당시 전경. 오른쪽 중간 유적이 기와 건물터다. 문화재청 제공


●백제 3년상 고고 자료로 실증

삼국시대 유적을 통틀어 정지산 유적을 제외하고 빈전으로 확인된 곳은 아직 없습니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행한 중국과 달리 고대 한반도는 3년상의 장의 풍습을 지켜왔습니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의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무령왕의 빈전도 정지산에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538년 백제의 사비(부여) 천도 이후에는 정지산에서 이 시기의 유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백제 패망까지 약 120년 동안 정지산은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신성한 지역으로 보존되었을 겁니다. 건물 주변을 몇 겹으로 에워싼 나무울타리(목책)는 이런 정황을 보여줍니다.

고대 중국의 경우 황제가 숨을 거두면 황궁 내 전각에 빈전(殯殿)을 설치하고 시신을 5~7일가량 모셨습니다. 조선시대 때에도 왕궁에 빈청(賓廳)과 빈전을 설치했죠. 일본은 궁 남쪽 뜰 혹은 궁궐 외곽에 빈전을 두었습니다. 정지산 유적 발굴은 고대 통치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는 국가의례가 동아시아 각국에서 어떤 변화를 거쳐 수용됐는지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무령왕이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상장의례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무령왕릉을 조성했다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중국의 상장의례가 백제를 거쳐 일본 열도로 전파되면서 거친 토착화의 과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빈례의 보편성만큼이나 정지산 유적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토기들이 발견돼 눈길을 끕니다. 조사결과 경북 고령군에 위치했던 대가야를 비롯해 영산강 유역, 전북 고창지역, 일본 스에키 지역의 토기들이 각각 확인됐습니다. 인근의 여러 고대 국가에서 파견한 조문단이 백제 왕실이 주최한 빈례에 참석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이와 관련해 전북 부안군 죽막동 바닷가에 있는 삼국시대 제사유적을 참고할 만 합니다. 이 유적에서는 백제와 가야, 왜, 중국 등 동아시아 각국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위해 죽막동 앞바다를 거친 각국 선원들이 이곳에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 당시 전경. 오른쪽 중간 유적이 기와 건물터다. 문화재청 제공


●빙고 유적의 비밀


정지산에 중요한 유적이 묻혀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발굴 초창기 성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합니다. 1996년 2월초 정지산 북쪽 끝부터 흙을 파내려가다 그달 말 3호 대벽건물터 바깥에서 ‘呂’자 형태의 시설이 발견됐습니다. 춘천 중도의 주거지 유적과 비슷한 형태여서 내심 기대가 컸지만 땅을 파내려가자 전투식량 봉지와 캔, 유리가 나왔습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이 구축한 전투 진지였습니다. 공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지산 유적의 전망은 백제 당시뿐만 아니라 이방의 군인들에게도 특별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백제 유적이 처음 확인된 시점은 한달이 지난 그해 3월 초였습니다. 백제시대 주거지가 먼저 나왔고 이어 3월 중순쯤 주거지 주변을 두른 목책이 확인됐습니다. 경사면을 오르는 형국으로 발굴이 진행됐는데, 그해 늦여름부터 정상부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근래에 들어선 무덤을 먼저 이장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죠. 6월쯤 대벽건물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발굴현장에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멀리 일본학자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현장을 찾아왔습니다. 일본학자들은 열도에서 확인되는 고대 대벽건물터와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일본 스에키 토기가 정지산에서 출토된 것도 그들에게는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7월 초부터 기와건물터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고, 8월에 저장구덩이와 빙고(氷庫) 추정 건물터에 대한 발굴이 이뤄졌습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정지산 유적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한 빙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지만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아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빙고라는 표현이 빠졌습니다.

이 시기(1996년 7~8월) 유적 동쪽 경사면의 23호 주거지 상층부에서 사격자(斜格子)무늬 벽돌 2점이 나와 다시 한번 정지산 유적의 높은 위상을 확인시켜줬습니다. 사격자무늬는 대각선의 빗금을 교차시켜 마치 전통한옥의 창살 같은 모양을 낸 것으로, 무령왕릉 벽돌에도 이 무늬가 새겨져있습니다. 사격자무늬 벽돌은 아마도 유적 정상부의 전각건물 바닥에 깔려있었으나, 건물이 폐기된 이후 빗물 등에 휩쓸려 경사면까지 내려왔을 겁니다.

젊은 고고학자의 혈기는 때로는 무모하기까지 했습니다. 정지산 정상까지만 발굴허가를 받았는데도 이 교수는 그 너머 경사면 아래까지 삽을 꽂았습니다. 분명 연결된 유구가 더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죠. 어차피 정지산 유적은 도로공사가 속행되면 송두리째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당국의 발굴허가 구역을 넘어서면 학예직 공무원 신분이던 그에게 상당한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유적이 계속 나오는 상황이어서 젊은 혈기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경사면 아래에서도 백제시대 대벽건물터 네 곳이 추가로 확인됐습니다. 그의 발굴 운(?)은 대학 교수로 옮기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재직할 땐 어린아이 인골이 묻혀있는 신라시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공인되기 전 인신공양의 흔적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주저함 없이 “고고학자로서 내 인생 최고의 발굴은 역시 정지산 유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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