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 한 수]〈4〉절체절명의 연애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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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이 푸르게 보이는 건 심란한 마음 탓/초췌해진 몰골은 임 생각 때문이지요. 날마다 흘린 눈물이 미덥지 않으시다면/상자 열어 다홍치마에 묻은 눈물 얼룩 보시어요. (看朱成碧思紛紛, 憔悴支離爲憶君. 不信比來長下淚, 開箱驗取石榴裙)
― ‘여의낭(如意娘)’(무측천·武則天·624∼705)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당 고종 이치(李治)에게 바쳤다는 시다. 비구니가 어떻게 황제에게 이런 애틋하고 절절한 시를 바쳤을까. 원래 그는 열넷 나이에 태종 이세민의 재인(여러 비빈 중의 하나)으로 들어갔다가 태종 사후에는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돼 장안 근교에 있는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졌다. 마침 고종이 태종의 기일을 맞아 그곳으로 제사를 드리러 행차했다. 황제가 선황의 기일에 분향 행차를 하는 건 황실의 풍속이자 예법이었다.

감업사로 오기 전 측천은 이미 황태자 시절의 고종과 서로 연정을 맺은 사이였다. 따라서 이 시는 지난날의 연인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애편지였지만 측천으로서는 결코 단순한 연애편지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내민 절박한 호소문이라고나 할까. 황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냥 비구니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처지. 야심만만한 측천으로서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움켜잡아야만 했다.

측천이 바친 이 시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 때문이었을까. 감업사에서 재회한 지 1년여 만에 황제의 부름을 받은 측천은 마침내 황궁으로 귀환했고, 그 후 황후를 거쳐 황제, 태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말하자면 측천은 태종 고종 두 황제의 아내였고, 고종을 뒤이은 중종과 예종 두 황제의 모친이기도 했으니 명실상부 불세출의 여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제 여의낭은 악곡의 명칭,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여의낭#여황제 무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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