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일본군 목 베고 스러져간 대만의 무지개 전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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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50년 수탈에 칼로 맞서 싸운 시디그족을 찾아가다
일본군 목 베고 스러져간 대만의 무지개 전사들

조상들이 물려준 숲을 지키고 부족의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지키고자 1930년 대만 시디그족은 칼을 들었다. 그리고는 수십 년간의 분노를 담아 일본인들의 목을 벴다. 장렬히 스러져간 그들을 기리는 후예들은 아직도 남아 그 용맹스러움을 이어가려 하지만 일본을 차마 잊지 못하는 슬픈 역사의 모순에 빠져 있다. 전사 복장을 한 시디그족 후예 와탄 텐무 씨.
조상들이 물려준 숲을 지키고 부족의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지키고자 1930년 대만 시디그족은 칼을 들었다. 그리고는 수십 년간의 분노를 담아 일본인들의 목을 벴다. 장렬히 스러져간 그들을 기리는 후예들은 아직도 남아 그 용맹스러움을 이어가려 하지만 일본을 차마 잊지 못하는 슬픈 역사의 모순에 빠져 있다. 전사 복장을 한 시디그족 후예 와탄 텐무 씨.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라 불렀던 16세기. 세계 곳곳을 항해하던 포르투갈인들의 입이 아시아 한구석에서 떡하고 벌어졌다. 이름 모를 섬에는 1000년은 된 듯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깊은 계곡과 높은 산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감동해 외쳤다. ‘일랴 포르모사(ilha formosa·아름다운 섬)’. 그러나 얼결에 외국어 이름을 얻은 섬은 그 아름다움이 독이 돼 끊임없이 누군가의 침입을 받으며 아름다움을 빼앗겨야 하는 숙명을 떠안게 됐다. 이후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 일본, 중국 국민당까지 수많은 외세가 섬을 휩쓸었다.

○ 대만, 반세기 지배한 日에 호의적

오늘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은 대만의 시디그족. 7000년 동안 대만 섬에서 살아온 원주민 중 한 부족이다. 그들은 일본에 맞서 1930년 ‘무지개 전사들’의 반란을 주도했다. 대만 원주민은 한족과는 혈통과 언어가 다른, 말레이폴리네시아 계통 민족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만에서 일본의 식민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조직적인 무력 항쟁을 일으킨 것은 원주민들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대만을 지배했지만 현재 대만 사람들은 일본에 무척 호의적이다. 기자가 대만의 관광지에서 구입한 과자 등 상품의 대부분에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함께 표기돼 있었다. 심지어 최근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접속 수역에서 대만이 일본과 ‘물대포 충돌’까지 벌인 것을 두고 고개를 갸웃하는 외국인도 많다.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친근한 감정을 가지는 건 복잡한 역사의 결과물이다. 역사적으로 대만인들은 계속해서 식민통치를 경험해 왔다. 그들 관점에서는 네덜란드나 청나라, 일본, 중국 국민당 모두 다 외래 정부일 뿐이었다. 오히려 수만 명의 대만인을 희생시킨 국민당의 철권통치는 일본 식민지 시절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의 유화정책도 한몫을 했다. 일본에 한반도는 식량 및 지하자원 수탈의 대상이자 대륙 침략의 발판이었다. 그러나 대만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열도의 연장선 또는 홋카이도처럼 확장한 영토로 여겼다. 한반도처럼 강압통치를 할 필요가 적었다.

사실 일본의 유화정책은 반쪽짜리였다. 그들은 고산에 사는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금수만도 못하게 여겼다. 삶의 터전인 숲의 나무와 천연자원을 강탈하고,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자기 나라의 숲은 가만히 두면서, 대만 원주민이 사는 고산지역의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내 본토로 실어 날랐다. 이런 점에서 대만 원주민들의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또 다른 초상일 수 있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추석 직전 대만을 방문해 일본 식민지 시절 차별과 탄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디그족과 그 후예들을 취재했다. 시디그족은 이른바 ‘머리 사냥(Head Hunting)’을 했던 부족. 적의 머리를 베지 못한 남자는 무지개 다리 너머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었다. 북유럽 바이킹 전사들의 천국 ‘발할라’ 이야기와 비슷하다. 시디그족 후손들의 현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폐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 7000년 살아온 섬의 주인들

“숲 속 나뭇잎보다 많은 일본놈들이 있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들과 싸우려는 나의 결심은 저 거대한 산보다 더 크다.”(영화 ‘시디그 발레’ 중 주인공 모우나 루도의 말)

타이베이에서 버스를 타고 대만 중부 지역인 타이중까지 3시간. 타이중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난터우 현 런아이 향 부리까지 1시간, 부리에서 루산 온천까지 또 1시간 반. 루산 온천 버스 정류장에 내려 또다시 산으로 산으로 해발 고도를 높여가며 걸어 1시간여. 지난달 24일 그렇게 버스를 갈아타고 걷기를 반복해 해발 1100m에 육박하는 마흐푸 마을에 도착했다.

해발 1100m급의 수많은 봉우리와 산 사이사이로 안개와 구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흐푸 마을이 있는 산은 유난히 키가 큰 병풍을 여러 겹으로 둘러놓은 듯했다. 멀리에 계곡 하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으며 깊숙이 박혀 있었다. 때마침 쏟아진 장대비가 합쳐진 계곡물은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흘렀다. 그 소리는 산 병풍을 오르고 올라 해발 1100m 고지에 선 낯선 이의 귀에도 쏙쏙 들어왔다

지난 수십 년간 사람들이 거의 다녀가지 않은 듯,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된 산에서는 나무가 거리낌 없이 자라 무성해져 있었다. 숲은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을 울창한 나무 뒤에 숨긴 채, 저 멀리 계곡 아래서 누군가가 무얼 하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볼 수 있게 했다. 완벽하게 몸을 감추고 계곡 아래 누군가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최상의 구조였다.
▼ 일제의 동화정책에 “아리가토 아리가토”… 원수를 사랑한 후손들 ▼

①일본군은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일부 시디그족을 매수해 원주민들이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우서사건에 참여한 시디그족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또 다른 시디그족 사람들. ② 사진 가운데 사람이 시디그족 마흐푸 마을 족장인 모우나 루도. ③ 대만에서는 시디그족 전통의상을 입은 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구족문화촌(한국의 민속촌)에서 일하는 일부 시디그족 후예들만이 전통의상을 입고 문화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족 이야기를 해줄 뿐이다. 구족문화촌에서 일하는 시디그족의 후예들.
①일본군은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일부 시디그족을 매수해 원주민들이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우서사건에 참여한 시디그족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또 다른 시디그족 사람들. ② 사진 가운데 사람이 시디그족 마흐푸 마을 족장인 모우나 루도. ③ 대만에서는 시디그족 전통의상을 입은 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구족문화촌(한국의 민속촌)에서 일하는 일부 시디그족 후예들만이 전통의상을 입고 문화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족 이야기를 해줄 뿐이다. 구족문화촌에서 일하는 시디그족의 후예들.
산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도 아무도 만날 수 없는 한적한 곳. 마흐푸 마을로 가는 길 초입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마흐푸 고전장(古戰場)’이라고 적힌 빨간 팻말만이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살짝 알려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저 비에 젖은 풀 내음만 가득한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청일전쟁에서 이긴 뒤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은 1895년 대만으로 들어왔다. 청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의 입장에서는 식민 통치국이 일본으로 바뀐다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대만 인구의 2%를 차지하며

7000년 전부터 섬을 지켜온 고산족 원주민들에게서 일어났다. 원주민이 살던 고산지대를 내버려두었던 과거 식민 통치국들과 달리 일본은 고산지역의 울창한 나무와 오랜 세월 숨겨진 자원을 그냥 두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산과 계곡, 사냥터를 온전히 지키고 그곳에 들어온 침입자의 목을 베어야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조상들의 영혼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고산족들. 그들에게 일본군의 침입은 곧 7000년간 지켜온 자신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14개로 분류되는 대만 내 원주민 중 가장 용맹했던 것으로 알려진 시디그족은 이들의 침입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시디그족 마을 중 마흐푸 마을의 족장이자 침입자의 목을 가장 많이 벤 것으로 명성을 떨치던 모우나 루도는 부족과 함께 산 위에서 숲과 구름과 안개, 비에 몸을 숨기며 저 아래 계곡을 따라 침입하는 일본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적의 머리를 베는 그들의 용맹함은 일본이 동원한 근대적 무기 앞에 어떠한 힘도 쓰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7000년 세월 지켜온 숲을 스스로 베어 일본의 군수물자로 바쳐야 했다.

모우나 루도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성냥의 화약 부분을 벗겨 수십 년간 모으는 일로 풀었다. 시디그족에 대한 멸시와 폭력, 노동 착취, 차별을 일삼던 일본에 언젠가 성냥을 모아 만든 화약으로 대항할 생각이었다. 이 계획은 1930년 10월 27일 실행됐다. 시디그족 수백 명은 일본 군인, 경찰 등 일본인들이 모여 가을운동회를 하는 우서(霧社) 공학교로 몰려갔고 일본인 130여 명의 목을 벴다. 그러나 격렬했던 투쟁은 50여 일 뒤인 그해 12월 말 일본이 동원한 군대와 기관총 대포 등 중화기에 좌절되고 만다. 일본군의 손에 죽기 싫었던 이들은 가족 모두가 자신의 터전이었던, 숲 속 큰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일본군에게 잡힌 사람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일본은 시디그족 중 우서 사건에 참여했던 부족에 적대적이었던 상대 부족을 매수해 그들의 목을 베어오게 하기도 했다. 항전을 계획할 때 이미 부족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던 모우나 루도도 쓸쓸히 자결했다. 모래알 같은 일본군과 싸웠던 시디그족은 우서 사건이 끝난 이후 1600여 명 중 겨우 298명만이 남았다.

82년 뒤 조용한 숲, 이곳 어디선가 어느 시디그족은 갓난아기와 남편과 그들의 부모와 함께 울며 자결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일본의 돈에 매수당한 가난한 부족에게 목을 내줘야 했을 것이다. 이제는 어느 부족도 제 사냥터를 지키기 위해 망을 볼 것 같지 않은, 그저 조용한 숲으로 변해버린 이곳. 숲 속 곳곳에 숨어 계곡 아래 일본군에게 활을 쐈던 그 많던 부족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루산 파출소 장붜씬 경관은 “여기서 마흐푸 마을 사람이나 그 시절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 그들의 후예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파출소 뒷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도 누구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활을 들고, 칼을 차고, 또 그들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하얀색, 빨간색, 검은색 줄무늬가 섞인 전통 옷을 입은 사람은 아예 찾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저 온천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호객 행위가 넘치고 숙박업소, 음식점만이 가득한 이곳. 그들은 일본군의 공격에 모두 스러져간 걸까.

○ 일본군으로 참전한 남편 자랑도

루산 온천 지역에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돌아나가면 나오는 해발 500m의 칭류 마을. 난터우 현 런아이 향 지역을 2박 3일간 오가며 찾아보려 애썼던 시디그족의 후예 500여 명이 여기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시디그족이 다시는 고산지대의 울창한 자연 속에 숨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며 고산 중에서도 평지에 속하는 이 마을에 살아남은 298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31년 5월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족장을 정할 수도, 전통 옷을 입을 수도 없게 했다. 평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이들은 6년 만에 60명이 죽었다. 가슴 아픈 기억도 60명 몫만큼 사라졌다.

일본이 떠난 후 이 마을은 입구와 가옥의 문, 담벼락 등에 시디그족을 상징하는 문양을 조금씩 새겨 넣었고, 벽에는 모우나 루도 족장과 그들 조상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그려 넣었다. 그들의 흔적은 벽화로, 문양으로 조금씩 되살아났다.

시디그족 후예인 오빈 나위 할머니. 일본군이 그의 부모를 살해했지만 그에게 일본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디그족 후예인 오빈 나위 할머니. 일본군이 그의 부모를 살해했지만 그에게 일본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리가토, 아리가토.” 오빈 나위 할머니(89·반란 당시 7세)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써왔다던 시디그어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배워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일본어도 모두 잊었다. 세월은 심한 노환을 가져왔고 그에게서 언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능력을 대부분 앗아갔다. 그런 그가 끝까지 잇지 못한 한마디. 그나마 힘을 내 명확히 내뱉을 수 있는 한마디는 고맙다는 뜻의 일본어인 ‘아리가토’였다. 우서 사건 당시 마흐푸 마을에 거주했던 할머니는 부모를 모두 일본군에게 잃었다. 그는 일본 지배의 최대 피해자였으며 이 마을 시디그족 중 가장 고령자이자 사건을 직접 겪은 산증인이었다. 기자는 90세가 다 돼 말을 잃은 지금도 가슴속 어딘가에 일본에 대한 말 못할 분노와 복수심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너무나도 확실하게 빗나갔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허름한 집 높은 벽 위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 젊은 남편은 일본군 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가 자신의 남편이며 일본을 위해 싸운 자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힘겹게 말했다. 남편 이야기를 하는 90세 노인의 눈에서 누군가를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이 읽혔다.

할머니의 지인들에 따르면 할머니는 남편이 1937년 제2차 중일전쟁은 물론이고 뒤이은 태평양전쟁에 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일본군 소속 ‘고사의용대(高砂義勇隊)’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또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느라 ‘아리가토’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의 남편 역시 우서 사건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마흐푸 마을 출신이었으나 그들의 조상이 무참히 살해당한 7년 뒤 일본군이 돼 참전한 일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끝내 일본인이라 믿었으며, 취재진이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 힘겨운 몸을 끌고 나와 “아리가토”라고 수십 번 말했다. 7세 때 부족 1000여 명이 죽어가는 걸 어린 눈으로 목격하고서도 일본인을 잊지 못하는 역사의 모순을 안은 할머니는 계속 허리를 숙였다.

○ 국민당 정권, 대만 주민 수만 명 학살

이 마을에서 만난 루비 마흐 할머니(72)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맥을 잇고 있는 시디그족 후예 중 우서 사건의 주도자이자 항일 투사였던 모우나 루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모우나 루도의 딸 마흐 모우나는 우서 사건 당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자녀 둘은 물론이고 남편과 형제까지 모두 잃었다. 외로운 삶을 살던 그는 칭류 마을에서 태어난 두 달 된 아기였던 루비 마흐 할머니를 양녀로 입양했다. 그렇게 마흐 모우나와 할머니는 20여 년을 애틋한 모녀지간으로 지냈다. 할머니는 마흐 모우나가 일본군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결한 아버지를 가슴 깊이 그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대물림된 그리움을 보여주듯 루비 마흐 할머니의 집 안에는 시디그족 전통 방식의 베틀로 만든 각종 천 장식물이 많았다. 거실의 한쪽 벽면에는 모우나 루도의 위풍당당한 사진과 마흐 모우나의 흑백 사진이 늘 손녀를, 딸을 내려다보고 있다. 할머니는 거실 장식장 위에 부족 전통 술을 매일 바꿔 떠놓고 부족을 위해 숲 속에서 산화한 조상을 기리고 또 기린다. 혹시 몰라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은 몇 장씩 더 인화해두고 이불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역사의 모순을 그대로 떠안고 사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도 취재진을 일본에서 온 것으로 착각해 유창한 일본어를 건네며 맞아줬다. 자신은 일본어를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어쩌면 형제가 됐을, 아버지가 됐을, 친척이 됐을 이들을 모두 우서 사건으로 잃고도, 그들을 평생 그리워하며 참배하며 살고도 일본어를 쓰고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 덕에 근대화가 됐다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반된 태도를 동시에 가지고 사는 걸까.

대만의 역사는 그들이 일본을 차라리 좋아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대만 중앙연구원 부연구원인 저우완야오(周婉窈) 박사가 쓴 ‘대만-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에 따르면 대만의 식민지 경험과 일본의 유화정책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흐려지게 했다. 게다가 1945년 해방 이후 대만으로 건너온 장제스 국민당 정부(당시 대만 국민의 13%에 불과했던 소위 외성인·外省人)의 철권통치는 일본의 그것보다 더 무자비했다. 이런 사실은 대만 본성인(本省人)은 물론이고 원주민들까지 반대급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는 말이 나오고, 정치·사회적 차별 등 일본 식민정치의 폐해들이 잊혀질 정도였다. 이를 저우 박사는 “역사가 그들을 복잡한 방식으로 조롱했다고 봐야 맞을 것”이라고 했다.

13%의 사람들에게 학대당한 87%의 분노는 1947년 2월 27일 외성인 출신 단속원들이 밀수한 담배를 팔던 대만 본성인을 구타하고 이 과정에서 본성인이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한 2·28사건에서 극에 달했다. 국민당 정권은 나라의 안정을 이유로 본성인과 원주민 수만 명을 죽였다(자료에 따라 1만∼10만명).

게다가 1930년 우서 사건 이후 일본은 원주민들의 재무장 및 항일투쟁을 막기 위해 철저히 원주민 친화·동화 정책을 썼다. 대만은 일본이 최초로 만든 식민지였으므로 이곳에서의 성공은 대외 과시용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일본은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이 수십 년간 같은 지역에 머무르며 원주민과 친분을 쌓도록 했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공학교에서는 일본 순사가 교사직을 맡게 해 오랜 시간을 거쳐 스승과 제자의 정이 쌓이게 했다. 손준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우서 사건 이후 일본이 원주민에게 편 동화 정책은 겉으로는 가장 부드러운 정책이었지만 그 이면은 자신의 부모, 친척을 모두 죽인 일본인에 대한 비판마저 사라지게 만든, 그들을 마음껏 미워할 자유마저 사라지게 만든 가장 잔인한 정책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대만 원주민들의 현재 모습은 일제 통치의 가장 잔인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영화 ‘시디그 발레’에서 모우나 루도는 “우리는 진짜 남자다.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 오직 용감한 영혼만이 입장이 허락되는, 조상들이 있는 하늘의 집으로 걸어간다”라고 말하며 숲 속 나뭇잎보다 많았다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무지개 전사들은 하늘의 집에서, 역사가 만든 모순을 그대로 안고 살아야 하는 슬픈 후예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또 하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우리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금만 더 겪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 ‘비명을 찾아서’나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디스토피아가 펼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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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터우=글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사진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시디그족#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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