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빈민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 만든 美 얼 쇼리스

  • 입력 2006년 1월 18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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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얼 쇼리스 씨의 ‘스승’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일방적 강의 대신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 속에 있는 답을 스스로 찾도록 돕는다. 인문학이 가르치려는 아름다움은 이미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김미옥  기자
빈민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얼 쇼리스 씨의 ‘스승’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일방적 강의 대신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 속에 있는 답을 스스로 찾도록 돕는다. 인문학이 가르치려는 아름다움은 이미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김미옥 기자
11년 전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초로(初老)의 미국 작가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작가의 질문에 20대 초반의 이 여죄수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여죄수의 말이 종교를 뜻하겠거니 생각한 작가가 심드렁하게 “정신적 삶이 뭐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아, 그러니까 인문학을 말하는 거군요!” 깜짝 놀라는 작가를 여죄수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래요. 인문학.”

작가 얼 쇼리스(69) 씨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이 여죄수의 눈빛은 그가 1995년 빈민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창설한 계기가 됐다.

경기문화재단 주최로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에 참석차 방한한 쇼리스 씨를 만났다.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북미 호주 아시아 3개 대륙 5개 도시에서 53개 코스가 운영된다. 11년간 전 세계에서 빈민 4000여 명이 그의 코스를 졸업했고 최근엔 한해 신입생이 1200여 명에 이른다. 국내에서도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클레멘트 코스를 도입해 지난해부터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프란시스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 학기엔 17명의 노숙자가 수료했다.

하지만 뉴욕에서 첫 코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시도는 “미친 짓”으로 불렸다. 재단들에 후원을 요청할 때마다 “빈민들에게 인문학 교육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사재를 털어 문학 역사 등을 가르칠 교수들의 강의료를 마련한 쇼리스 씨는 약물중독자 재활센터 등을 돌며 약물중독자 매춘부 노숙자 등 31명의 학생을 모았다.

“겨우 글만 읽을 줄 알던 학생들이 함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어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읽을 때 학생들은 가족과 전통의 법도와 국가의 법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이해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교수들이 더 많이 배웠어요.”

첫 1년 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중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나중에 치과의사가 됐고 전과자인 한 여성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됐다.

쇼리스 씨는 빈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교수들의 강의를 녹화해 뉴욕의 교도소에서 방영했다. 시카고에서는 노숙자 쉼터에서 신문 범죄기사를 즐겨 읽는 여성들에게 헤밍웨이의 소설 ‘살인청부업자’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게 했다.

“폭력적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리스 비극을 읽혔죠. 그리스 비극만큼 폭력적인 내용도 없잖아요(웃음).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의 맛을 알기 시작했고 인문학에서 풍요로움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그의 교육 목표는 단 하나, ‘삶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 가르치기’다.

“빈민은 열악한 환경과 불운이라는 포위망에 둘러싸인 사람들입니다. 포위망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존을 위한 즉각적 대응밖에 없어요. 즉각적 대응 대신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삶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문학을 통해 반성적 사고를 시작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입니다.”

11년간이나 해온 일이지만 쇼리스 씨는 학생들이 도중에 그만둘 때의 괴로움엔 익숙하지 않다. 학생들의 중도 탈락률은 평균 45%. 주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을 비롯한 질병 때문이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하도록 만든 여죄수 비니스 워커도 감옥에서 에이즈와 싸우며 석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끝내 숨졌다.

질병과 고통이 여전하다면 인문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회의에 시달리면서도 쇼리스 씨는 멈출 수 없다. 그 까닭은 인문학은 ‘시작하기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자유로워지기,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를 시작하도록 사람을 이끌어 줍니다. 이런 태도가 삶의 방식이 된다면 사람들과 자유롭게 관계 맺고 민주주의가 삶의 윤리로 정착되는 것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해요.”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 얼 쇼리스는

소외계층을 위한 칼리지 수준의 인문학 교육 과정인 ‘클레멘트 코스’의 창설자이자 자문위원회 위원장. 미국 시카고 대학을 졸업했고 1972년부터 미국 잡지 ‘하퍼스 매거진’의 편집자를 지냈다. ‘위대한 정신의 종말’ ‘라티노스: 인민들의 자서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보물: 클레멘트 코스의 인문학’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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