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민주주의가 몇 개인가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경제 위기, 안보 위기 옆에서 또 하나의 위기 담론이 피어나고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 위기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증폭기 역할을 한다.

1987년 개헌 이후 자유 보통 비밀 평등선거가 정착했다. 국민은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좌우(左右) 쌍방향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어느 선거에서나 승자에게 투표하지 않은 사람은 승복하기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심판으로 탄핵이 성립되지 않는 한 누구도 대통령 임기를 중단시킬 수 없다. 작년 촛불시위 때 일부 세력이 ‘MB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 진입까지 시도한 것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이 거리에 넘친다면 이것이 곧 민주주의 위기다.

DJ는 북의 권력세습에 대해선 단 한마디 말도 없다. 그런 어른이 ‘광장(廣場)민주주의’ 같은 말로 민중 선동에 앞장서고, 민주당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헌정(憲政) 흔들기다. 야당이 의회민주주의를 자해(自害)하면서까지 아스팔트 민주주의에 승부를 건다면 운동권단체로 탈바꿈하는 것이 제격이다. 오늘날 광장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통용되는 나라는 따로 없다.

선동 의도 짙은 DJ식 위기론

물론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국정을 독선적으로 운영해선 안 된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선택하고, 정권은 임기 중 책임정치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지만 선거가 전부일 수는 없다. 늘 다양한 민의를 수렴하고 조화를 이루어내는 국정이어야 한다. 재·보선 같은 작은 선거에 나타난 민심의 변화도 무겁게 수용해야 한다. 지난날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과 총선에서 이겼으나 재·보선에선 연패했다. 그럼에도 민심과 불화(不和)하다가 국정 추진력을 잃고 여당한테도 버림받았다. 4·29 재·보선 참패에 이어 노 전 대통령 서거의 후폭풍까지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엔 거울 같다. 국민이 만들어준 정권을 성공시키는 것이 곧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입법 행정 사법의 권력분립이 위태로운 현실도 아니다. DJ와 민주당은 이 대통령을 독재자로까지 낙인찍는데, 참 낡은 수법이다. DJ가 대통령일 때 여당 의원들은 청와대로 불려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했다. 요즘 이 대통령은 자신의 성(姓)을 딴 친이(親李)의원들한테서도 쓴소리를 듣는다. 대통령을 압박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에선 소수 야당에 절절맨다.

DJ는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5월 국회개원 50주년 경축연설을 하면서 “민주주의의 꽃은 의회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다수결을 부정하고는 의회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다. 16대 국회 때 DJ가 여소야대(與小野大)를 만들어준 민의를 왜곡하면서까지 자민련에 의원들을 꿔주고, DJP연합 복원에 매달린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2003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이듬해의 총선 승리를 ‘정권의 완성’이라고 본 것도 ‘수(數)의 민주주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DJ가 민주주의 위기를 말하려면 지금 18대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수결 원칙의 위기’부터 지적해야 설득력이 있다.

사법부에서는 신영철 대법관의 지방법원장 시절 ‘재판 관여 시비’를 둘러싸고 평판사들이 대법원장의 결정까지 흔드는 집단행동을 했다. 사법민주주의 과잉이라고 할 정도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무소불위(無所不爲)가 아니라 너무 뒷걸음치는 게 오히려 문제라고 본다. 대통령이 왜 그렇게 유약하냐는 질타의 소리도 만만찮다.

서울 도심이 무법천지가 된 뒤에야 폭력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이 ‘인권탄압’ 혐의를 뒤집어쓴다. 공권력이 법치와 질서를 포기하면 불법세력엔 내 세상이겠지만 대다수 국민은 누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나. 법치의 붕괴야말로 민주주의 위기다. 미국 경찰은 가벼운 시위를 하던 연방 하원의원 5명이 폴리스라인(경찰 통제선)을 넘는 순간 수갑을 채워 체포했다. 이를 ‘공안탄압’이라고 하는 미국인은 없다.

정권이 못 버틴다면 이 또한 ‘운명’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말살되고 있다는 주장도 과장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은 대통령에 대한 비방 글로 넘친다. 일부 좌파 미디어와 인터넷 매체는 반정부 진지(陣地)가 돼 있다. DJ는 대통령 때 무리한 세무조사로 비판적 신문들을 목 졸랐고, 노 정권은 좌파세력을 총동원해 주요 신문들을 괴롭히며 기자실 대못질까지 했다. MB 정권이 그보다 더한가.

역대 정권은 다 반대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10년 만에 정권을 잃은 쪽의 권력 금단증세까지 감안하면 이 정권은 더 큰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MB 정권이 이 시험을 돌파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그 또한 ‘운명’이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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