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감상 길잡이 20선]<9>그림과 눈물

  • 입력 2009년 3월 26일 02시 58분


◇그림과 눈물/제임스 엘킨스 지음/정지인 옮김

《“학자들은 너무 많은 글을 읽어서 그림과 접촉할 능력을 거의 상실했고,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반응은 신뢰할 수 없으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검증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야말로 그림을 벽 장식물 이상의 뭔가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소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느낀 만큼 보인다!

미술사와 관련해 한국 사회에선 잘못 인용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글귀가 있다, 유홍준 씨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정조 시대 미술비평가 유한준의 글을 원용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알게 되면 참으로 아끼게 되고, 아끼면 참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안목이 트이면 이를 수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는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 유한준의 글에선 아는 것(知)이 출발점이다. 그런데 유홍준 씨의 해석에선 아끼는 것(愛)이 아는 것을 앞서는 것으로 둔갑한다.

이를 꿈보다 해몽이라고 치켜세우거나 한국 사회의 지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소극으로 치부하기보다 그런 엉뚱한 해몽을 환영해 마지않은 대중의 심리를 읽을 필요가 있다. 거기엔 반만년 한국미술을 교과서와 박물관에 박제시킨 고고미술사학계에 대한 반발심리와 애정만 있다면 그동안의 지적 열등감은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일종의 자기최면이 숨어 있다.

서양미술을 다룬 이 책도 그런 대중적 심리를 반영한 책이다.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누구보다 그림을 많이 접하고 잘 안다는 미술사학자일수록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경험을 한 경우가 왜 드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답은 “정보의 더미는 진정 마음으로 느끼는 우리의 능력을 짓눌러버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술관에서 설명판을 흘낏 보거나 미술서적을 들춰본 사람은 누구나 그림에서 진정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서서히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知)가 승하면 진정 감동하는 마음(哀)과 아끼는 마음(愛)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눈물을 자아내는 그림은 따로 있다. 저자는 이를 3가지로 분류했다. 절대적 존재의 충만함과 신성함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그런 절대적 존재의 부재를 드러내는 그림,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결빙됐거나 어긋나 있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책 표지에 그려진 디리크 바우츠의 ‘울고 있는 마돈나’ 같은 중세 종교화가 첫 번째에 해당한다면 황량한 풍경을 담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태양의 위치와 나무들의 그림자가 어긋난 반 고흐의 ‘올리브나무’는 세 번째다. 미국의 현대화가 마크 로스코의 검은 직사각형 그림들은 셋 모두에 해당한다.

이들 그림은 미술을 독립적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래 눈물을 미심쩍은 것, 객관적이지 못한 것으로 바라본 서양미술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눈물의 과잉만큼 눈물의 결여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술에서 눈물을 제거하는 것은 사랑 없는 삶에 안주하는 것과 같다며.

그렇다면 미술의 이해에서 앎과 사랑 중 무엇이 먼저여야 할까. 해답은 앎과 눈물이 병행 가능하다고 믿는 저자의 말에 이미 담겨 있다. “눈물은 명료한 시야를 흐리지만, 균형 잡힌 이해의 가능성까지 씻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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