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몸사림 은행에 “눈치 안봐도 돼” 분명한 메시지

  • 입력 2009년 1월 9일 02시 58분


8일 출범한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와 함께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할 금융감독원의 기업재무개선지원단 사무실. 채권금융기관조정위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감원 바로 옆 건물에 입주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8일 출범한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와 함께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할 금융감독원의 기업재무개선지원단 사무실. 채권금융기관조정위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감원 바로 옆 건물에 입주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금융당국, BIS 기준 비율 10%로 완화 의미

《금융 당국이 8일 “다음 달부터 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0% 이상만 유지하면 된다”며 건전성 기준 완화 방침을 밝힌 것은 은행들이 이제는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출을 늘려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자본을 쌓도록 독려한 근본 목적이 ‘은행의 건전성 제고’가 아니라 ‘은행 자본 확대를 통한 기업 지원’에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정부로서도 올해 상반기의 극심한 경기침체를 큰 충격 없이 넘기려면 은행 대출을 늘려 기업과 가계의 자금난을 풀어주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조선업과 건설업을 시작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하되 소비와 생산에 필요한 자금은 충분히 공급해야 정상적인 경제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시중은행들 건전성 위기 넘겨… 기업으로 돈 제대로 흐르게”

회사채 매입 기준 완화하되 기업 구조조정 속도는 높일 듯

일부 지방銀 등 경영간섭 우려 ‘자본확충펀드’ 여전히 꺼려

○ 몸 사리느라 돈줄 조인 은행들

시중은행들은 작년 말 은행 자본을 많이 쌓아 BIS 비율 12%를 맞추라는 금융감독원의 권고를 받은 뒤 이 비율을 사실상 새로운 건전성 기준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BIS 비율을 떨어뜨리는 위험가중자산이 많아질 것을 우려해 신규 대출을 극도로 꺼린 것은 물론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도 앞 다퉈 회수했다.

기업들은 “은행들이 정작 비가 올 때는 우산을 뺏고 있다”고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 지난해 1차 부도를 맞았다가 가까스로 최종 부도를 면한 한 의류업체 사장은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평소 같으면 당연히 만기를 연장해주던 은행이 돌변해 갑자기 원금을 갚으라고 해서 황당했다”고 말했다.

이런 추세는 통계로도 입증돼 지난해 12월 말 기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액은 전달보다 3조8025억 원 줄었다. 은행들이 신규 대출을 줄이고 기존 대출을 대거 회수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은행 관계자는 “BIS 비율이 12%가 안 되면 채권 발행에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통폐합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돌아 은행들이 위축된 상태”라고 전했다.

○ “BIS 비율 10%만 되면 개입 없다”

금융 당국이 ‘BIS 기준 완화’를 결정한 것은 은행의 몸 사리기가 도를 넘으면서 시중의 자금흐름을 왜곡시키는 부작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당국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과 파생금융상품 문제가 휩쓸고 간 미국 유럽 등 외국 은행과 국내 은행은 상황이 다른데 BIS 비율을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금융 당국은 막힌 ‘돈맥’을 뚫기 위해 △한국은행 등이 출자한 자본확충펀드를 통한 은행 자본 확대 △채권시장안정펀드를 통한 기업 자금 지원 △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지원 대상 선별 등 세 가지 방안을 추진해 왔다.

이 중 주요 은행의 자본 확충은 이미 충분히 이뤄졌고 다른 은행들도 이달 말경 자본확충펀드의 지원을 약간만 받으면 BIS 비율 12%를 맞출 수 있게 됐다.

신한은행의 경우 지난해 9월 말 기준 BIS 비율이 11.9%였지만 작년 12월 말에는 13%대 중반으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국민은행의 BIS 비율도 9.77%에서 12%대 중반으로 대폭 상승했다.

당국이 정책 우선순위를 ‘은행의 건전성 강화’에서 ‘대출 독려’ 쪽으로 전환한 것은 이 같은 여건 변화를 감안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은행 검사 때 BIS 비율이 10% 미만이 되면 좀 자세히 들여다보고 8% 아래로 떨어지면 경영 개선을 권고하는 적기 시정조치에 들어가겠지만 10% 이상이면 당국의 관리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은행들이 대출에 나서도 건전성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 그래도 은행은 여전히 고민

당초 금융 당국은 한은에서 10조 원, 기관투자가에서 8조 원, 산업은행에서 2조 원을 끌어들여 자본확충펀드를 만든 뒤 BIS 비율 12%를 못 맞추는 은행에 자금을 빌려줄 예정이었다.

최근 주요 은행 대부분이 기업 대출을 늘려도 문제가 안 되는 수준으로 개선됐지만 BIS 비율 12% 선을 못 맞춘 우리은행과 지방 은행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만 자본확충펀드의 지원을 받으면 재무상태가 부실한 은행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간주돼 정부의 경영 간섭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은행들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지난해 말 외화자금을 조달할 때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 주고 경영 간섭을 한 전례가 있다”며 “자금을 직접 지원받으면 각종 현안에 끼어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에 따라 자본확충펀드의 성격이 은행 구제를 위한 공적자금 지원이 아니라 실물경기 부양을 위한 순수한 지원금이란 점을 정부가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문이 금융계에서 나오고 있다.

○ 회사채 사주되 기업 옥석 가려야

정부는 은행 자본 확대에 이어 자금조달시장을 정상화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신속히 추진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자금조달시장 정상화는 지난해 9월 15일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금리가 치솟으면서 회사채 발행이 힘들어진 기업을 직접 도와주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대책이다. 이에 따라 당국은 작년 말 10조 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해 회사채 등의 매입에 나섰다.

문제는 채권안정펀드가 출범하고 20여 일이 지났지만 매입 규모는 5000억 원에 불과하다는 점. 기업의 자금 담당자들은 “펀드의 매입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신용위험이 있는 회사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매입 대상을 위험도가 다소 큰 채권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구조조정은 금융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조치다.

정부는 건설사와 중소 조선사 등 111곳에 대한 1차 구조조정안을 16일이나 늦어도 23일까지 내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기업에 관련 서류를 요청하고 주말에도 비상근무를 하며 시한을 맞출 계획이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박용 기자 parky@donga.com

김병주 채권기관조정위원장

구조조정 대상社선정

파괴보다 창조에 무게

당초 시한 23일 넘길듯

8일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장으로 선출된 김병주(69·사진) 서강대 명예교수는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준비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조조정 대상을 선정하는 시한은 당초 정했던 23일보다 늦어질 것”이라며 “파괴보다 창조에 무게를 두고 합리적으로 무리 없이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회사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채권단의 결정에 불복하는 채권자가 채권 매입을 청구하면 매입 가격과 조건을 조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김 위원장은 “외환위기 당시 기업 구조조정은 법도 없이 선제적, 사전적으로 이뤄졌지만 지금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채권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처리하게 돼 있다”며 “은행, 보험 등 업종 간에도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잘 조율하겠다”고 말했다.

위원회의 활동기간과 관련해 김 위원장은 “세계 금융위기가 조기에 끝나면 6개월 만에 마무리될 수도 있지만, 최근 상황을 감안할 때 1년 정도는 돼야 (기업 구조조정) 정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는 금융감독원 옆인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나대투빌딩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허경만 한국투자공사 감사, 김형태 증권연구원장, 나동민 보험연구원장, 송웅순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장경준 삼일회계법인 대표가 위원으로 선임됐다.

김 위원장은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위원장,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 위원장, 신한·조흥은행 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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