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모던 뽀∼이’ 73년 세월을 건너오다

  • 입력 2008년 11월 13일 02시 59분


■ 연극 ‘깃븐 우리 절믄날’ 1935년 경성 재현

이상-박태원 등 경성 지식인들 묘사

당시의 언어로 ‘식민지콤플렉스’ 그려

고코니 이탄다(여기 있었군).” “아, 기미카(자넨가).” “제 아모리 미쓰코시 인공정원이래두 그<지 한겨울에 아이스고히가 있을 턱이 있나?”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정원에서 료마에(더블 재킷)를 입은 박태원과 해진 양복에 때 묻은 구두를 신은 이상이 대화를 나눈다.

4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습실. 25일 오르는 연극 ‘깃븐 우리 절믄날’의 연습이 한창이다. 이 작품은 1935년 경성을 배경으로 소설가 기자로 활동했던 이상 박태원 정인택의 우정과 갈등, 이들과 권영희라는 카페 여급 간에 얽힌 사각관계를 통해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복잡한 심리 세계를 나타냈다.

배우들의 대화에는 고히(커피) 그<지(그렇지) 허두(하도) 하셋세요(하셨어요) 등 귀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억양, 일본어와 어설픈 영어 단어가 섞여 있다.

구보 박태원 역을 맡은 김종태 씨는 “낯선 단어와 억양, 지금은 사라진 장단음까지 살려야 하는 데다, 이런 표현을 예스럽지 않고 모던한 느낌이 나도록 말해야 한다”며 “항상 말이 제일 어렵다”고 말했다.

작가관에 대해 티격태격하는 이상과 박태원의 대화를 바라보던 성기웅(34) 연출은 이상 역을 맡은 전병욱 씨에게 “이상을 천재라기보다 뭔가 자기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로 설정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성 연출은 “이들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쓰며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근원에는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모습은 비슷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책상에는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등 1930년대를 다룬 책이 10권 넘게 쌓여 있었다.

연출과 배우의 연령대가 모두 30대 중반이어서 작품에 대한 논의도 자유롭다. 연습 후 저녁 식사를 마친 성 연출과 전 씨는 마주 서서 이상의 캐릭터에 대해 한참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번 작품은 지난해 1930년대 경성 서민들의 모습을 다룬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에 이은 후속작이다. 전작에서는 거대한 무대 세트로 경성 종로거리 곳곳을 재현하며 호평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단출한 테이블 정도가 보일 뿐이다. 공간을 경성부립도서관 옥상,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다방 등 경성의 주요 건물 옥상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성 연출은 “이번 작품은 대화로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풀어가기 때문에 무대 세트보다는 언어의 묘미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의 별명은 ‘성디테’다.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연출력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지난해 ‘조선 형사 홍윤식’과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을 통해 1930년대를 집중 조명하며 주목을 받았던 그는 별명다운 고증을 선보였다.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에서는 1930년대 경성말을 원로배우 오현경 씨가 배우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일본어를 섞어 쓰는 당시 사람들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배어나게 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일본어 강습을 받게 했다. 잡지 ‘세르팡’ ‘중외일보’, 극장 ‘낭화관’ 등 당시에 유명했지만 지금은 낯선 단어들도 등장한다.

“1930년대 경성의 문화는 현대 서울 문화의 시작점이기에 흥미롭다”는 그는 앞으로 “1936년을 배경으로 두 작품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1936년은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중일전쟁(1937년)으로 전시총동원체제로 넘어가기 직전이면서 모더니즘 문화가 극치를 이뤘고, 이상의 ‘날개’도 이때 발표됐습니다. 한 작품은 이상과 박태원의 우정을 다룬 세 번째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25일∼12월 31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1만5000∼2만5000원. 02-708-5001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