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유시민/'부적절한 술판'벌인 386에게

  • 입력 2000년 5월 26일 19시 33분


‘386 당선자들의 부적절한 술자리’가 일으킨 파문을 보는 소감은 ‘허탈함’과 ‘막막함’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른바 ‘386붐’은 머지 않아 그 빈약한 실체가 드러나고 말 정치적 거품이라는 지적은 진작부터 있었다. 그러나 국민은 지난번 선거에서 적지 않은 젊은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었다. 비리와 무능으로 오염된 기성 정치인들의 ‘경륜’보다는 ‘386’으로 표현되는 깨끗함과 개혁정신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졌으니 어찌 허탈하지 않으랴.

그보다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막막함’이다. 그들은 당선이 확정되기가 무섭게 당내 민주화와 선거법 개정, 크로스보팅 도입 등 정치개혁 과제를 서슴없이 제기했다. 여야를 넘어 토론하면서 5·18 묘역을 합동 참배한 것은 기성정치의 관행을 깨는 신선한 파격이었다. 몇 안되는 정치신인들이 당장 무언가를 해낼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장차 그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정치를 가꾸어낼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달리 관심과 애정을 쏟을 만한 정치세력이 없는 터라 그 희망의 싹은 작지만 소중했다.

그런데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부적절한 술자리’에서 스스로 그 싹을 밟아버렸으니 어찌 막막하지 않겠는가. 이제 도대체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하며 무슨 낙으로 정치를 본단 말인가.

당사자들은 발언과 성명을 통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저지른 잘못에 비해 너무 심하게 매를 치는 것 아니냐는 억울한 감정도 언뜻언뜻 내비쳤다. 임수경씨의 인터넷 제보 내용에 과장과 왜곡이 있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하지만 ‘부적절한 술자리’에 있었던 그대들이여,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리시라. ‘경건해야 할 5·18’이라는 표현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오히려 더 모질게 몽둥이를 휘두르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그 매를 말없이 받으시라. 그대들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늘 폭포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분노와 지탄이 아니라 386에게 한오라기라도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 될지도 모르는 절망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나는 5·18 저녁에 놀이판을 벌인 대학생들을 향해 5·18은 ‘남의 아버지 제삿날’이 아니라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부탁드린 바 있다. 하지만 그 날을 ‘자기 아버지 제삿날’로 기리는 그대들이 한 일은 그런 충고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실망과 배신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환멸과 냉소까지 안겨주었다.

‘386 당선자’들은 이제 대학생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일각을 차지한 국민의 대표들이다. 과거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는 강철같은 이념적 확신과 불퇴전의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갖가지 검은 유혹을 이겨내야 할 지금의 그대들에게는 민의를 받드는 겸허함과 공인으로서의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만약 그대들이 그날의 술자리가 알려질 경우 어떤 파문이 일어날 것인지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느슨한 자세를 가졌다면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던 정치개혁의 꿈은 아예 지금 접는 것이 좋겠다.

김민석의원을 비롯한 386 정치인들은 이번 일로 회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특히 초선들은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넘어진 셈이다. 국민의 가슴에도 냉소와 환멸의 상처가 깊이 그어졌다. 이것을 치유하려면 ‘부적절한 술자리’에 있었던 그대들은 지난 80년대에 치렀던 것 못지 않은 희생과 헌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가혹한 요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대들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다. 또다시 절망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그대들이 그걸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싶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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