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채상병 특검법 둘러싼 당론과 기율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4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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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병 특검법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 추천 특검이 탄핵 구실 만들고
그것에 놀아나 다시 촛불 켜지는 게 문제
특검법만 보는 근시안적 태도 무책임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한날 한곳에 모였을 때 드러나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의사다. 단, 조건이 있다. 구성원들은 사전(事前)에 서로 소통해서는 안 되고 당파를 지어서도 안 된다. 루소의 이론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지에서 일반의지로 가는 과정에 언론 정당 같은 매개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대회식의 공산주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는 언론과 정당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나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집단의지가 각기 다른 정당을 중심으로 형성돼 서로 경합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은 여전히 무소속으로 정당 밖에서 활동할 수 있다. 하지만 뜻을 합쳐 관철하는 데는 정당이 유리하다. 여기서 정당의 당론(黨論)과 개별 의원의 관계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 민주주의 본고장인 영국의 정당에서는 원내총무를 회초리(whip)라고 부른다. 당론에 반해 행동하려는 의원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하면서 기율(紀律)을 잡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초리를 각오하고 반기를 든 의원들이 많아지면 오히려 정당 지도부가 붕괴된다. 이때 새로운 지도부를 중심으로 다시 기율 있는 정당으로 재구성될 수 있어야 그 정당은 존속한다. 당론과 기율은 이렇게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새 국회 당선인 모임에서 ‘당론을 무산시키는 행동’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4·10총선에 앞서 당론에 반해 행동한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반면 국민의힘에서는 안철수 의원 등이 채 상병 특검법을 재의결할 때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한다. 200석에 가까워 여유가 넘치는 정당에서는 오히려 당론이 중시되고 고작 100석 남짓한 정당에서는 당론이 무시되는 모습이 대비된다.

의원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론에 반해 행동하는 건 헌법상의 자유다. 게다가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은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민주당과 그 배후의 원탁회의 세력은 탄핵으로든 자진 하야를 압박해서든 윤석열 대통령을 임기 전에 끌어내려야 한다고 공언해 왔다. 대통령은 민주당이 추천하는 2명의 후보 중에서 특검을 골라야 한다. 이 대표 주변 변호사들의 법 사술(邪術)을 봤지 않은가. 그런 유의 특검이 선정돼 탄핵 구실을 만들고 그것에 놀아나 제2의 촛불이 켜지면 안 의원 등은 막아낼 자신이 있는가. 채 상병 특검법에는 찬성하고 탄핵 소추에는 반대하는 것이 뜻대로 될까.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에의 과실치사 혐의 적용에 격노했다면 그가 늘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해병대 수사단은 군인 사망 사건에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수사 개입이 되지 않는다. 박정훈 수사단장이 오히려 군사법원법 개정 전 과거 관행에 따라 행동하면서 월권한 셈이다. 임 사단장에의 과실치사 혐의 적용은 경찰이 가리면 된다. 탄핵 거리도 되지 않는 사유로 대통령을 탄핵 소추해 정치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막아야 한다.

김건희 특검법 반대가 국민의힘의 당론이라면 그런 당론은 백날 뒤집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도 그것으로 윤 대통령이 교체되고 그런 토대 위에서 보수 정당을 재빨리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면 못 할 선택도 아니다. 그러나 채 상병 사안으로 윤 대통령을 교체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힘든 반면 그 과정에서 정치의 한 축인 보수 정당이 새롭게 재구성되기보다는 궤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나아가 툭하면 탄핵 절차를 가동하는 나쁜 관행이 굳어져 정치 전반을 남미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은 정치적으로도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당 정치에서는 대통령 소속 당과 국회 다수당이 일치하면 행정부와 입법부가 일체가 돼 아이러니하게도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는 폐단이 없지 않다. 대통령 소속 당과 국회 다수당이 다른 지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때다. 물론 견제와 균형의 중심에는 대통령 거부권이 있다. 정략적 법안, 포퓰리즘 법안, 체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법안에는 언제든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협치는 대통령과 국회가 공히 교착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채상병#특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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