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오바마의 패배 연설을 들어보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3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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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대선 승리 연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나오는 모습. 명연설가 오바마 대통령의 패배 연설은 어떨지 많은 미국인들이 궁금해한다. 사진 출처 백악관 홈페이지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대선 승리 연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나오는 모습. 명연설가 오바마 대통령의 패배 연설은 어떨지 많은 미국인들이 궁금해한다. 사진 출처 백악관 홈페이지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I’d like to hear a concession speech that Obama might give.”(오바마의 패배 연설을 들어보고 싶다)

미국인들 사이에 유명한 농담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에 관한 한 패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대선 경선과 본선, 대통령이 된 뒤 재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사천리로 당선됐습니다. 심지어 치열하기로 소문난 하버드대 법대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 자리도 단번에 당선됐습니다. 초등학교 때 반장 선거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성인이 된 후 선거는 백전백승입니다. 이 농담은 오바마의 탁월한 정치 능력을 말해주는 것과 동시에 패배 연설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설의 달인 오바마 대통령도 패배 연설을 하게 된다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은 연설을 ‘하다’라고 하지만 영어는 ‘give speech’(연설을 주다)라고 합니다.

패배학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승자의 연설만큼 패자의 연설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패자의 연설은 승자의 연설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에게 축하를 건네는 연설이어야 합니다. 패배 연설을 ‘concession speech’(컨세션 스피치)라고 합니다. ‘승복 연설’이라는 뜻입니다. 패배를 의미하는 ‘loss speech’나 ‘defeat speech’라고 하지 않습니다. ‘concede’(양보하다)라는 단어 속에는 화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역사에 길이 남는 패배 연설을 유형별로 알아봤습니다.

△“His success alone commands my respect, but that he managed to do so by inspiring the hopes of many Americans is something I admire.”(그의 승리 하나만으로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더구나 많은 미국인에게 희망을 주면서 승리를 이뤄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

첫째, 감동형입니다.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도 훌륭하지만 패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연설은 더 훌륭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매케인은 연설 서두부터 오바마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지지자들의 야유가 터졌습니다. 매케인은 손을 들어 야유를 저지하며 오바마 당선의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야유가 박수로 바뀌었습니다. 이 연설에는 ‘humble’(겸손한)과 ‘courageous’(용기 있는)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따라다닙니다. 용기는 겸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 연설입니다.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틸 때 이 연설이 소환됐습니다.

△“I felt like the little boy who had stubbed his toe in the dark - too old to cry, but it hurt too much to laugh.”(어두운 곳에서 발가락을 찧은 소년의 기분이다. 울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고, 웃기에는 너무 아프다)

둘째, 솔직형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연설입니다. 패배 후 복잡한 심경을 소년에 비유한 연설로 단번에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유명한 구절이라 선거 때마다 패자들이 “링컨이 말하기를”이라며 단골로 인용합니다. ‘stub toe’(스텁 토)는 발가락을 찧는 것을 말합니다. 책상다리에 걸려 발가락을 찧었다면 “I stubbed my toe on a table leg”라고 합니다.

△“Let’s get it over with.”(빨리 해치우자)

셋째, 빨리빨리형입니다. 1980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대패했습니다. 개표 초반부터 패배가 확실했던 터라 투표 마감 3시간 후인 오후 9시 50분쯤 연설장으로 향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빠른 패배 연설입니다. 그때 참모에게 한 말입니다. ‘get it over with’는 즐겁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을 서둘러 끝낸다는 뜻입니다.

이 연설은 논란이 됐습니다. 내용이 아니라 타이밍이 문제였습니다. 서부 지역에서 아직 투표가 마감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패배 연설을 들은 유권자들이 투표소 방문을 포기하면서 함께 진행 중이던 상하원 의원 선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대선 후보는 오후 10시(동부시간 기준) 전에는 패배 연설을 하지 않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연설 전문가들은 패배 연설의 5대 법칙을 제시합니다. 해야 할 것 4개와 하지 말아야 할 것 1개(4 dos & 1 don’t)로 요약됩니다. 선거 패배뿐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해야 할 것은 ‘humble’(겸손하라), ‘humorous’(유머를 가져라), ‘gracious’(품위를 지켜라), ‘self-deprecating’(자신을 낮춰라)입니다. 반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don’t be bitter’(억울해하지 말라)입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발송되는 뉴스레터 ‘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에서 더욱 풍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ckey@donga.com


#오바마#패배 연설#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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