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맞을 각오하고 밭으로” 러시아 보란 듯 꿋꿋이 생업 잇는 농부·상인들[조은아의 우크라 전쟁 취재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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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3일차: 농부·상인들 모인 전통 시장을 찾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려 정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아 닷새간 수도 키이우를 찾았습니다. 이곳에 발을 닿은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매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장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큰 울림을 줬습니다. 키이우는 제게 이 모든 걸 꼭 널리 알려달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취재 후기로 소개합니다.

▶1부 보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226/118075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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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227/118091102/1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의 베사라비안 전통시장은 싱싱한 딸기 오렌지 등 다양한 농산물로 가득했다. 농산물들은 기자가 특파원으로 주재 중인 프랑스 파리의 시장에서 보던 상품들보다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이었다. 장기간 보관하기 쉬운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가 유독 많았다. 전쟁 국가라서 수출입이 쉽지 않으니 시장에 물건이 부족할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많아 시장은 전쟁에 따른 교역 위축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정문 바로 옆에 있는 곡물 가게엔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다. 빵을 주식으로 삼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주 찾을 법한 곳이어서 의아했다. 밀가루로 만든 빵이 따뜻하게 구워져 나올 법한 아침, 곡물 가게와 이웃한 빵 가게도 폐업한 지 꽤 오래 되어 보였다.

이곳에서 30년째 식료품점을 운영했다는 나디야 브라우스 씨는 “전쟁이 길어지며 오랫동안 영업했던 상당수 곡물 가게와 빵집이 폐업했다. 곡물 가격이 비싸지자 사람들이 전통시장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님이 없어 썰렁한 시장에선 낯선 외국인 기자에 대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시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취재팀의 촬영을 금하며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냉랭한 분위기를 뚫고 상인들에게 말을 걸어봤다. 상인들은 겉보기엔 차가웠지만 속으론 뜨거운 결의를 품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아무리 우리를 공격해도 우린 끝까지 생업을 놓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전쟁 중에도 농사를 멈추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시장에서 곡물과 견과류를 팔고 있는 브라우스 씨는 “우리 마을이 러시아군에 포위됐을 때 폭탄을 맞을 위협을 무릅쓰고 감자와 야채들을 재배했다”며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허벌판의 농부들 머리 위에서 언제든 폭탄이 떨어질 수 있었지만 과거 대기근의 경험을 떠올리며 일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밭이나 농업 기기가 파괴돼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도 많았다. 기자가 방문한 키이우 인근 농장에는 폭탄 잔해나 여러 발의 총알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도 전쟁 중일수록 생업을 더 굳건하게 이어가고 하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유리 크레민스키 씨는 “이 시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전쟁으로 농업 시설이나 밭이 파괴돼 불행하게도 손실이 크다”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맡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해 전쟁으로 인한 불안함을 최소화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하며 생업으로 복귀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 1년. 혹독한 시련의 시간은 우크라이나인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 대다수에게선 전쟁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느끼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 시간을 견뎌야 할지 알게 된 듯했다. 어업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빅티리야 술로키아 씨는 “물론 전쟁 초기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이젠 이 상황에 적응이 됐다”면서 “우린 뭐든지 겪어낼 수 있다는 걸 세계에 보여줬기 때문에 이제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해결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 시장이, 그리고 우크라이나 경제가 전쟁 이후 얼마나 힘차게 일어설지 궁금해졌다. 13일부터 이틀 동안 키이우 취재 중 만난 젊은이들도 “전쟁을 겪어 무서울 게 없는 우리는 빠르게 극복할 것이다” “세계인에게 우리의 저력을 보여줬으니 시장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이후 그간 단련된 저력을 발휘하길 기대해본다.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 못지않은 역사를 쓰길 기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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