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추이 개인전 ‘부유하는 빛’… 쓰레기장서 술병 뚜껑 모아 작업
라우센버그 ‘코퍼헤드 1985/1989’… 노동착취 심각한 구리산업 관심 미술 전시에서 ‘오브제’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감상법이다. 오브제란 예술품, 객체, 상징물 등 여러 뜻을 지녔지만 미술에선 주로 소재나 재료를 일컫는다. 작가가 어떤 소재를 쓰는지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기봉 작가(65)의 개인전을 비롯해 가나 태생 작가 엘 아나추이(78), 미국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2008)의 개인전은 모두 독특한 오브제를 선보여 눈길을 끈다.
이 작가의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중요한 오브제는 ‘막(幕)’이다. 뭔가를 가리는 걸 뜻하는데, 전시에 소개된 신작 36점 가운데 설치작 1점을 제외하면 모두 막을 씌웠다.

이 작가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막에 대한 단초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30년 넘게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인간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 같은 일종의 막을 통해 어렴풋이 인식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유일한 설치작인 ‘A Thousand Pages’(2022년)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펼쳐 놓은 형태인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겼다. 다음 달 31일까지.

아나추이에게 병뚜껑은 아프리카 식민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는 노예상들이 노예를 럼주와 물물 교환한 참혹한 역사에서 이런 개념을 떠올렸다. 이에 1990년대 후반부터 쓰레기장에서 모은 술병의 뚜껑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사용해왔다. 이화령 바라캇 컨템포러리 디렉터는 “그의 작품들은 쉽게 지나치는 작은 오브제도 예술적 가능성이 깃들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고 했다. 내년 1월 29일까지.

라우센버그는 1984∼1991년 현지 예술가나 노동자와 협업했던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 프로젝트’ 때부터 구리에 관심을 가졌다. 첫 국가였던 칠레에서 구리 산업은 나라의 주요 경제 기반임과 동시에 심각한 노동착취가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를 본 작가는 구리를 이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다음 달 23일까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