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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막-병뚜껑-구리… 그 전시에 가면 ‘오브제’가 말을 건다

입력 2022-11-30 03:00업데이트 2022-11-30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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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화 화가’ 이기봉 개인전… 비트겐슈타인의 책 ‘논고’서 영감
아나추이 개인전 ‘부유하는 빛’… 쓰레기장서 술병 뚜껑 모아 작업
라우센버그 ‘코퍼헤드 1985/1989’… 노동착취 심각한 구리산업 관심
미술 전시에서 ‘오브제’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감상법이다. 오브제란 예술품, 객체, 상징물 등 여러 뜻을 지녔지만 미술에선 주로 소재나 재료를 일컫는다. 작가가 어떤 소재를 쓰는지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기봉 작가(65)의 개인전을 비롯해 가나 태생 작가 엘 아나추이(78), 미국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2008)의 개인전은 모두 독특한 오브제를 선보여 눈길을 끈다.

이 작가의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중요한 오브제는 ‘막(幕)’이다. 뭔가를 가리는 걸 뜻하는데, 전시에 소개된 신작 36점 가운데 설치작 1점을 제외하면 모두 막을 씌웠다.

이기봉 작가의 ‘Stand on Shadow No. 9-3’(2022년)은 캔버스 위에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막처럼 덧댔다. 국제갤러리 제공이기봉 작가의 ‘Stand on Shadow No. 9-3’(2022년)은 캔버스 위에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막처럼 덧댔다. 국제갤러리 제공
방식은 이렇다. ‘안개화 화가’로 불리는 이 작가는 이번에 선보인 안개화 35점을 먼저 캔버스에 그린다. 그 후 캔버스 위에 1cm 정도 간격을 두고 얇은 아크릴 판이나 폴리에스테르 섬유로 막을 만든다. 여기에도 일부분의 그림을 그려 3차원(3D) 영화처럼 겹쳐 보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 작가는 “중요한 건 그림과 막 사이의 1cm라는 빈틈”이라며 “이 간격에 하나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막에 대한 단초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30년 넘게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인간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 같은 일종의 막을 통해 어렴풋이 인식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유일한 설치작인 ‘A Thousand Pages’(2022년)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펼쳐 놓은 형태인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겼다. 다음 달 31일까지.

엘 아나추이의 ‘New World Symphony’(2022년)는 술병 뚜껑을 두들기고 자르고 이어 붙여 만들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엘 아나추이의 ‘New World Symphony’(2022년)는 술병 뚜껑을 두들기고 자르고 이어 붙여 만들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종로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아나추이의 ‘부유하는 빛’에선 ‘병뚜껑’이 핵심 오브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 병뚜껑으로 만든 작품 3개를 선보였다. ‘New World Symphony’(2022년)는 가로 8m, 세로 6m인 대형작품으로, 모두 병뚜껑을 평평하게 편 다음 하나하나 잘라서 이어 붙였다.



아나추이에게 병뚜껑은 아프리카 식민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는 노예상들이 노예를 럼주와 물물 교환한 참혹한 역사에서 이런 개념을 떠올렸다. 이에 1990년대 후반부터 쓰레기장에서 모은 술병의 뚜껑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사용해왔다. 이화령 바라캇 컨템포러리 디렉터는 “그의 작품들은 쉽게 지나치는 작은 오브제도 예술적 가능성이 깃들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고 했다. 내년 1월 29일까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Copperhead-Bite VIII_ROCI CHILE’(1985년)는 구리 작업의 출발점이 된 ‘코퍼헤드 바이트’ 연작 중 하나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로버트 라우센버그의 ‘Copperhead-Bite VIII_ROCI CHILE’(1985년)는 구리 작업의 출발점이 된 ‘코퍼헤드 바이트’ 연작 중 하나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1964년 미국 작가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았던 라우센버그는 ‘구리’로 만든 캔버스로 유명하다. 용산구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리고 있는 ‘코퍼헤드 1985/1989’ 역시 그의 구리 캔버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이번 전시에도 구리 캔버스 작품 11점이 관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들은 노동자, 거리의 간판, 그라피티, 동물 등 칠레의 일상 풍경을 담아냈다. 작가는 구리 캔버스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사진을 찍어낸 뒤 아크릴 물감과 변색 약품을 바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라우센버그는 1984∼1991년 현지 예술가나 노동자와 협업했던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 프로젝트’ 때부터 구리에 관심을 가졌다. 첫 국가였던 칠레에서 구리 산업은 나라의 주요 경제 기반임과 동시에 심각한 노동착취가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를 본 작가는 구리를 이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다음 달 23일까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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