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10년만에 재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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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10주년 맞아 9일 출간
본보에 직접 쓴 칼럼 23편 등 포함
외손자 이준승 씨 회고글 새로 실려
“할아버지, ‘날 기억하게 해달라’ 유언”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생은 시상대에서 월계관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휴머니스트 제공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생은 시상대에서 월계관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휴머니스트 제공
“서서히 중앙 깃대를 올라가는 일장기,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기미가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일본을 위해 뛴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받는 조선 동포를 위해 뛴 것이다.”

스무네 살 청년은 나는 듯이 달렸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세계 27개국 선수 55명 가운데 깡마른 동양 선수가 제일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2시간29분19초2.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엄청난 질주에 10만 관중은 함성을 내질렀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야 할 순간. 하지만 청년은 월계관에 금메달까지 받고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일장기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생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왼쪽). 선생은 국제 대회에 참가할 때 팬들에게 ‘KOREAN’ 국적을 적은 사인을 선물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손기정 선생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왼쪽). 선생은 국제 대회에 참가할 때 팬들에게 ‘KOREAN’ 국적을 적은 사인을 선물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대한민국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마라토너 고 손기정 선생(1912∼2002).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9일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휴머니스트)이 다시 출간된다. 1983년 처음 나온 뒤 절판됐다가 2012년 모교인 서울 양정고 동문회에서 재출간한 지 10년 만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손 선생에게 달리기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몸으로 뛰고 달리는 운동마저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일본 국적으로 세계대회에 나갔을 때도 언제나 팬들에게 한글로 사인을 건네며 자신의 국적은 ‘코리아’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자서전에는 선생이 1976년 동아일보에 직접 쓴 칼럼 23편이 모두 실렸고, 이후 쓴 글도 담겼다. 그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특별하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 선생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가 이듬해 6월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다. 선생이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아야 했던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가 독일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도 동아일보였다. 당시 그리스 정부가 선생에게 투구를 선물하기로 했지만 일제가 이를 알리지 않았던 것. 1986년 투구를 되찾은 선생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1987년 보물로 지정됐다.

자서전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폐회식으로 끝을 맺는다. 선생은 4년 뒤 열리는 서울 올림픽을 소개할 대표자로 무대에 올랐을 때를 평생 잊지 못했다. “손기정, 코리아”라는 소개에 “이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라며 감격했다.

재출간된 책에는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5)의 글이 새로 실렸다. 선생이 별세하기 전까지를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나라 사랑이 뜨거웠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출연료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금 모으기 운동’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게 아니라 ‘코리아’라는 세 글자가 당연해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남긴 당부가 아니었을까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마라토너#손기정 선생#탄생 110주년#자서전 재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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