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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오늘과 내일/홍수용]막무가내 관치

입력 2022-07-05 03:00업데이트 2022-07-0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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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인상 자제 요청’은 과한 재량권 행사
물가와의 전쟁, 정부 스스로 망칠 건가
홍수용 논설위원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제롬 파월 의장은 지난달 집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계획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했다. 집값이 급락할 수 있으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통화정책의 방향을 보여주고 그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게 타당하다고 설득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설득(moral suasion)’이라고 한다. 법적 권한 밖에 있는 재량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미국식 관치(官治)로 볼 수도 있다.

지난달 말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잘나가는 상위 기업’에 대해 임금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도덕적 설득, 관치에 해당한다. 과도한 임금인상이 물가를 자극할 수 있으니 인상폭을 줄여 달라고 부총리 재량으로 요구했다.

파월의 관치에 대해 미국인들은 부동산 거품 붕괴 가능성을 경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반면 추경호의 관치를 보는 시각은 ‘일리 있다’는 호평과 무리한 시장 개입이라는 혹평으로 나뉜다. 같은 관치를 하고도 추경호 쪽에 비판이 쏠리는 것은 자유를 강조해온 정부가 민간에 간섭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관치 자체가 민간에 끼어드는 행위다. 간섭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사람들이 당국자의 재량권 행사에 공감하고 인정하느냐, 이 지점에서 평가가 엇갈렸다.

파월은 금리를 대폭 올리는 빅 스텝에 이어 자이언트 스텝까지 밟았고, 채권 매입량을 줄이는 양적 긴축에도 속도를 냈다. ‘집 사지 말라’는 파월의 구두 개입은 그의 긴축적 행보와 일치했다. 대중이 설득된 이유다.

반면 물가를 위해 임금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추경호의 말은 기존의 정책 행보와 충돌한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초과세수가 53조 원 생길 것이라며 이를 당겨쓰는 62조 원짜리 ‘가불 추경’을 짰다. 돈을 대거 풀어 정부 스스로 물가 우려를 키웠다. 그래 놓고 민간에는 물가가 걱정되니 임금을 조금만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엇박자 설득에 직장인들은 ‘공무원 월급부터 깎아라’, ‘임금 줄일 테니 소득세를 내려라’며 분노하고 있다.

추경호의 임금인상 자제 요청은 대기업 직원이 낮은 생산성 때문에 밥값도 못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불 추경 당시 기재부는 대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 세수에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잘나가는 기업은 어쨌든 잘나간다”고도 했다. 기업의 생산성을 보는 시각이 세금을 당겨쓸 때는 긍정적이었다가 임금 얘기를 할 때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생산성은 노동만이 아니라 설비 현대화와 기술 개선, 경영 합리화의 산물이다. 과거 보수 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해 임금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중 잣대가 정부 신뢰를 깎아먹고 있다.

인플레 국면에서 최악은 앞으로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심리가 전방위적으로 퍼지는 것이다. 인플레 기대로 원가상승 요인이 없는 기업까지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리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향후 물가가 진정될 것이라는 신뢰를 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국은 물가대책으로 웬만한 건 다 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도대체 뭘 했느냐고 반문한다. 고위 공직자의 임금부터 깎고, 은행의 과한 수수료를 제한하고, 공공요금을 동결하고, 임대료를 조금만 올린 사람에게 세무조사를 면제해주고…. 일을 하려고 들면 아이디어는 차고 넘친다. 정부는 물가종합대책을 먼저 내놓은 뒤 민간에 대한 권고 중 하나로 임금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어야 했다. ‘막무가내 관치’가 물가와의 전쟁을 망치고 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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