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 원훈은 정권의 운명과 함께했다. 진보에서 보수 정권으로 교체된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8년 뒤 박근혜 정부 때 다시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같은 보수 정권이었지만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가 원훈 교체의 한 원인이었을 거라는 관측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도 지난해 6월 국정원 원훈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다. 이번엔 원훈석에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 글씨를 본떠 만든 ‘신영복체(어깨동무체)’를 쓴 것이 문제가 됐다. 신 전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뒤 1988년 특별 가석방됐다. 전직 국정원 직원들은 “대북 정보활동을 벌이는 국정원에 ‘간첩글씨체’가 웬 말이냐”며 릴레이 시위를 벌여왔다. 정권교체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가 1년 만에 국정원 원훈석을 바꾸겠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1947년 창설된 미국 CIA의 모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909년 만들어진 영국 비밀정보국(MI6)의 모토 ‘언제나 비밀’도 바뀐 적이 없다. 정파를 뛰어넘는 국가 정보기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제 환갑을 갓 넘긴 국정원 원훈이 이번에 또 바뀐다면 여섯 번째 원훈이다. 잦은 원훈 교체는 정권의 외풍에 휘둘린 정보기관의 흑역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원훈 바꾸는 것보다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