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노 입고 유치원 졸업사진 찍었던 소녀, 제작비 1000억 한국인 드라마 ‘파친코’ 만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3일 17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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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테리사 강 제공
프로필 사진. 테리사 강 제공

2017년 한국계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읽었을 때 테리사 강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소설을 TV쇼로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겠다.”

그녀는 2003년부터 미국 굴지의 에이전시 WME에서 일한 베테랑 에이전트였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 데이미언 샤젤 등과 일했고 폭발적 인기를 얻은 HBO의 TV시리즈 ‘왕좌의 게임’도 그녀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파친코’는 한국인 주연에 1910~1980년대를 아우르는 시대극인데다 배경도 부산 영도와 일본, 미국 등 스케일이 거대했다.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필요했다. 이 때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자막의) 1인치 장벽을 뛰어 넘어 달라”고 미국 관객들에게 당부하기 훨씬 더 전이었다. 그럼에도 강 씨는 이 소설이 나아갈 길이 있다고 믿었다. 지난달 25일 애플TV플러스로 공개된 ‘파친코’의 공동 총괄 제작자 테리사 강을 1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 부모님을 위해 만든 시리즈

강 씨는 ‘파친코’를 읽고 떠올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이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소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고, 또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한국인 4대의 고난과 역경을 그린다. 그는 “‘파친코’의 이야기가 정말 아름다웠고,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해 온 부모님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며 “부모님을 위해서 이 책으로 무언가를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셨지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순 없었어요. 조부모님이 일제 강점기 많은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지만, 그분들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만날 기회가 없었죠.”

그의 아버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비디오 대여 체인 ‘옴니 비디오’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2시간 씩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 영화를 볼 정도로 마니아였다는 그는 딸과 함께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봤다. 강 씨에게 어떤 드라마와 영화를 봤느냐고 묻자 줄줄이 리스트가 나왔다.

“모래시계는 아버지가 정말 재밌게 봤어요. 또 아버지가 박찬욱 감독의 팬이었기 때문에 ‘올드보이’가 나오자마자 저에게 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밖에 안됐을 텐데 말이죠. 보고 나서 정말 깜짝 놀라고, 한국의 영화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살인의 추억’, ‘쉬리’, ‘달콤한 인생’, ‘놈놈놈’….”

아버지는 딸이 어린 시절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면 하루 20달러씩을 주었다. 강 씨는 “당시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돈도 번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기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너무 좋은 조건으로 일을 시켜주셨다는 걸 깨달았어요”하고 웃었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 기모노 입고 유치원 졸업사진 찍은 사연
기모노 입고 있는 유치원 졸업사진. 테리사 강 제공
기모노 입고 있는 유치원 졸업사진. 테리사 강 제공

그녀가 ‘파친코’를 만들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강 씨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아무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유치원 시절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유일한 아시아인인 유치원에 다녔던 그녀는 졸업 사진에서 기모노를 입고 있다. 당시 전통 복장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선생님들이 한국을 몰라 그녀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기모노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 때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았어요. ‘파친코’에도 미국에서 아시아인을 만나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라고 묻는다는 대사가 나와요. 그런데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 했다는 역사는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죠. 저는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아시아계 미국인과 인류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 때 자이니치의 역사를 조사한 경험도 있었다. 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들이 온갖 차별을 겪는다는 것도 몰랐다. 자이니치가 핍박받는 현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기억했던 그녀가 ‘파친코’를 알아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 “선자는 내가 해야겠다”고 말한 윤여정

강 씨는 먼저 ‘더 테러’와 ‘더 위스퍼스’ 등을 제작한 한국계 작가 수 휴에게 책 ‘파친코’를 건넸다. 이전 드라마 제작을 마치고 오는 비행기에서 ‘파친코’를 읽은 휴는 ‘역사를 딛고 선 느낌’을 받았지만,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작품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강 씨는 “또 다른 한국계가 당신의 위치에 오르려면 7~10년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당신이 적임자”라며 설득했다.

제작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야기 자체에는 흥미를 갖는 곳은 많았지만, 고액의 제작비를 투입하려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제작진이 생각한 예산은 영국 왕실을 그린 대하드라마 ‘더 크라운’ 정도의 스케일이었다. 이것을 타협하지 않은 제작진은 결국 애플TV플러스와 함께 제작비 약 1000억 원을 투입한 8부작 드라마를 만들게 됐다.

‘파친코’를 연출한 2명의 감독 코고나다, 저스틴 전 또한 한국계이다. 또 출연진 650명 중 95%가 아시아인. 제작진이 영어로 대본을 쓰면 한국과 일본에서 번역해, 다시 감수하고 또 다시 이것을 번역하는 것은 물론 자막도 최소 3개의 언어가 필요한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강 씨는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이야기에 개인적인 감동을 느낀 경험은 처음이라고 했다.

윤여정과 함께 한 테리사 강. 테리사 강 제공
윤여정과 함께 한 테리사 강. 테리사 강 제공

“수 휴를 비롯한 제작자들이 모두 이 쇼를 좋아했지만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며 “윤여정 선생님과는 이틀 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본을 읽고 ‘선자는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선자의 심정을 자신이 이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또 오디션을 통해 파친코에 합류한 배우 이민호 씨는 한수라는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살려주었는데, 한국의 유명 배우가 우리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것이 정말 고무적이었죠.”

‘파친코’가 마침내 세상에 나온 뒤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시청자로부터 공감의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파친코는 왕이나 여왕, 대통령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생존하는 사람들(people)의 이야기입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또 그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유럽을 비롯해 여러 국가 출신의 친구들이 ‘나의 엄마와 할머니도 이런 삶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작진도 모든 가족에겐 ‘선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가 보편성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습니다.”

○ 영화 ‘기생충’ 기발함에 깜짝 놀란 미국 제작자들

‘나의 부모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강조한 강 씨에게 그가 본 한국 문화는 어떤 특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우선 어릴 때부터 봤던 영화는 물론 김기영 이창동 박찬욱 김지운 김성수 연상호 황동혁 류승완 이경미 감독 등의 팬이라고 털어놨다. 또 BTS뿐 아니라 H.O.T., 1TYM, 쿨, 2NE1, 블랙핑크, 박효신, 크러시 등 케이팝 음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며, 한국 문화에 자신감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는 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치면서 생겨난 고유의 ‘한’과 ‘흥’이 있어요. 저에게 영화 제작은 이 ‘한’과 ‘흥’을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정말 노래를 잘 하잖아요. 미국의 팝 음악과는 감성이 다르죠. 저는 한국 영화와 음악의 그런 부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래서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최근 한국 컨텐츠가 사랑받았을 때, 그것이 시간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져 기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부모님은 항상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올림픽 경기에서 미국과 한국이 싸울 때 늘 한국을 응원했다”며 웃었다.

또 영화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많은 작가, 감독, 배우들이 곳곳에서 상영회를 열어 이 영화를 보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할리우드 업계 사람들은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니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 씨는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있다고 봤다. 그는 “어릴 적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면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 했다”며 “지금은 누구나 핸드폰으로 손쉽게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이 한국 컨텐츠를 더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했다.

또 ‘파친코’를 통해 더 많은 기회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파친코가 다양성의 문을 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재능 있는 감독과 작가들의 이야기에 더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스스로를 믿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열정’은 전염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갖고 있는 열정이 점차 사람들을 타고 번져나가면서 그것은 현실이 되니까요. 그러니 당신의 본능, 당신의 직관을 믿으세요.”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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