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장 여는 순간 보석 만난듯… 29번째 게이고 작품 번역”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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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28년전 초기작, ‘조인계획’ 선보인 양윤옥 번역가
“켜켜이 쌓은 문장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에 정교한 건축물 나타나
日가부키 검은천 쓴 ‘구로고’처럼 번역자는 얼굴을 내밀어선 안돼
한문장을 12개 버전으로 써보기도”

일본작가의 소설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있다. 번역가 양윤옥(64·사진)이다. 국내에서 150만 부가 팔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2012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시리즈(문학동네·2009∼2010년) 등 일본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번역했다. 특히 추리소설계의 거장 게이고의 소설 중엔 양 번역가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양 번역가가 15년간 번역한 그의 작품은 29편에 달한다.

양 번역가는 24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최근 번역한 ‘조인계획’은 1994년에 출간됐지만 한국엔 지금에서야 처음 소개되는 게이고의 초기작”이라며 “첫 장을 펼쳤을 때 ‘드디어 숨은 보석을 만났다’는 생각에 설렜다”고 말했다. 조인계획은 스키점프 유망주 살인사건을 통해 천재적 재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양 번역가는 게이고의 문체에 대해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동작을 짧은 묘사로 켜켜이 쌓아가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에 정교한 대형 건축물이 머릿속에 출현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게이고 문체를 잘 알기에 번역 과정에서 설명을 덧붙일까 고민되는 순간마다 ‘원문에 충실하기’를 따른다고 했다. 조인계획에서도 원문에 쓰인 ‘날다’(飛)와 ‘뛰다(跳)’라는 단어를 놓고 고민하다 결국 원래 단어의 뜻을 살린 ‘날아오르다’와 ‘뛰어들다’로 번역했다.

“천재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는 점프 순간을 ‘날다’가 아닌 ‘뛰다’로 묘사합니다. ‘천재란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를 밟아 도약하는 것’이라는 니레이의 생각이 담겨 있죠. 작가 의도를 전달하기엔 ‘날아오른다’, ‘뛰어든다’는 너무 평범한 것 아닌가 고민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고픈 욕심도 들었지만 독자들이 숨은 뜻을 알아줄 거라 믿었죠.”

원문에 손을 댈 때도 있다. 편견이 들어간 표현이 우려될 경우다.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2014년) 중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랬다. 운전기사 ‘미사키’가 운전 도중 불붙은 담배를 창밖으로 튕겨버리는 장면에서 하루키는 ‘가미주니타키초에서는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이리라’라고 표현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이리라’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인지’라고 애매하게 얼버무려 번역했어요. 가상의 지명이라도 온 동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차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문장을 수십 개로 쓰는 집요함도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예스터데이’에서 ‘후렴구를 그야말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불렀다’라는 문장은 12가지 버전으로 써보며 고민했다. ‘쩌렁쩌렁한’의 원문은 ‘목욕탕적인, 잘 들리는’이다. ‘가장 신나는 부분을 그야말로 목욕탕적으로, 구성지게 뽑아냈다’, ‘가장 고조되는 부분을 욕실 스타일로, 구성지게 뽑아냈다’ 등이 후보였다. 그는 “문장은 쉽고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생각에 책에 나온 최종 문장으로 선택했다.”

양 번역가는 번역가를 ‘구로고(黑衣)’에 비유한다. 구로고는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에서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몸에 검은 천을 둘러쓰고 무대 진행을 돕는 이다.

“번역자는 원작자의 ‘구로고’입니다. 원작을 최대한 우리말로 매끄럽게 소개하는 것이 할 일이지요. 번역자가 자기주장을 하거나 얼굴을 내밀 일은 없어야 합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양윤옥 번역가#조인계획#구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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