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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과도한 정치권 개입, 수백 년 기록유산 망친다 [광화문에서/김상운]

입력 2021-12-25 03:00업데이트 2021-12-2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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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문화부 차장
강원 평창군 월정사는 전나무 숲길로 유명하다. 사찰 입구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산책로는 울창한 나무들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어 인산인해다. 반대 방향의 상원사로 가는 산책로는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길 중간 외진 곳에 중요한 역사 현장이 감춰져 있다. 흔히 ‘오대산 사고(史庫)’로 불리는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다. 화려한 단청의 2층짜리 전각인 두 건물(6·25전쟁으로 불타 1992년 복원)에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이 약 300년간 보관돼 있었다. 임진왜란에 상당수 실록을 잃은 조선왕실이 선조 39년(1606년) 삼재(三災)를 막을 수 있는 최고의 길지로 이곳을 낙점했다. 그러나 풍수지리도 일제 약탈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13년 총독부에 의해 오대산본 실록이 도쿄제국대로 옮겨졌다가 2006년에야 고국으로 환수됐다.

최근 오대산본 실록과 의궤가 정치권 및 문화재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현재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오대산본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며 23일 국회에 결의안을 제출한 것. 결의안에는 강원도를 지역구로 둔 여야 국회의원 등 63명이 서명했다. 앞서 17일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 의원 등과 함께 월정사를 방문해 주지 정념 스님과 면담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 징수를 ‘봉이 김선달’에 비유해 불교계가 거세게 반발하자, 여당이 대선을 앞두고 불심 달래기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사실 문화재가 오랜 세월 터 잡은 장소의 역사성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실록을 전란과 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대산 깊은 산중에 사고를 세운 선인들의 정성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국보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 관리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월정사와 강원도 등 지방자치단체는 사찰 경내 설립된 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서 보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평창군에 따르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설치된 수장고 밀폐장(외부 공기를 차단해 화재로 인한 소실을 막는 장치)이 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는 없다. 또 실록이나 의궤 특성상 전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다른 문헌과 대조하며 조사 연구하는 기능도 중요하다. 24명의 학예직 공무원으로 구성된 국립고궁박물관은 오대산본에 대한 연구논문집을 2011년에 펴냈다. 문화재계에서는 오대산본의 왕조실록의궤박물관 대여전시를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전문성이 요구되는 문화재 분야에 대한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이다. 여당 일각에선 임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은 현 정부에서 오대산본 이전을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기간에 전문가나 주무관청과 제대로 된 협의를 거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과거 정부에서 정치권의 입김으로 경주 월성 발굴이 ‘속도전’으로 치달아 문제가 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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