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 9년 뒤에도 ‘항일운동 불씨’ 여전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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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92주년 맞아
최규창 선생 당시 친필 서한 공개
일제 탄압-동맹휴교 생생히 기록

심정섭 씨가 3일 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규창 선생이 1938년 쓴 편지를 공개하며 항일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심정섭 씨가 3일 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규창 선생이 1938년 쓴 편지를 공개하며 항일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1929년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년이 지난 뒤에도 후배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이어갔다는 내용이 담긴 독립운동가의 편지가 83년 만에 공개됐다.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78·광주 북구 매곡동)는 3일 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규창 선생(1908∼1949)이 1938년 1월 친척에게 보낸 편지를 본보에 공개했다. 최 선생은 편지에 “광주고등보통학교(현재 광주제일고)가 4개월 동안 동맹휴교로 학생들이 학업에 정진할 수 없고 교장마저 없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적었다. 또 “납부금이 낭비돼 학부모들은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다. 5학년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동맹휴업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데 애로가 많을 것 같다”며 우려했다.

최 선생은 편지 끝부분에 “4학년 학생들도 장래가 걱정된다. 전남 나주에 통학하는 학생들도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일본인들의 무성의한 교육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1925년 광주고보에 입학한 최 선생은 이듬해인 1926년 11월 학생들의 항일비밀결사 모임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했다.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닷새 후인 11월 3일 일제는 명치일을 맞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학생들은 광주시내에서 조직적으로 항의했고 이후 전국에서 학생 5만4000여 명이 참가하는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됐다. 성진회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학생독립운동이 전국과 해외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하정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학예연구사는 최 선생의 편지에 대해 제2차 학생독립운동의 주축인 후배 학생들의 무등회 활동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1938년 광주고보 학생들은 독서회(1939년 무등회로 개칭)를 조직해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3년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 징병제를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벌였는데 이를 2차 학생독립운동으로 부른다. 최 선생은 1928년 광주고보 동맹휴학 투쟁의 주동자로 붙잡혀 퇴학 처분과 함께 8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하면서 일제에 의해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32년 동아일보 영암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야학을 운영했다. 1990년 정부는 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심 씨는 “선생의 편지는 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9년이 지난 뒤에도 꺼지지 않고 일제에 치열하게 항거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주학생독립운동#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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