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나는 순간’ 속 보말죽… 아픔 보듬는 위로의 음식[김재희 기자의 씨네맛]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15일 11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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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의 설명만으로 눈길을 끄는 영화가 있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빛나는 순간’도 그렇다. ‘70세 제주 해녀 진옥과 30대 PD 경훈의 사랑 이야기.’ 이 한 줄의 문장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듣는 순간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모성애가 아니라 멜로의 사랑이라고?’ ‘둘은 어쩌다 사랑에 빠지는데?’ ‘스킨십도 할까?’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제주 해녀 진옥(고두심)의 삶을 담기 위해 경훈(지현우)은 제주를 찾고, 오랜 거절 끝에 진옥이 다큐를 찍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는 설명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지만 이는 ‘위로’라는 한 단어로도 갈음할 수 있다. ‘과연 가능한가’ 싶은 둘의 사랑은 서로를 향한 위로에서 시작한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이를 진심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이라면 모든 걸 초월한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전한다.

진옥이 만든 보말죽, 경훈의 상처를 보듬는 첫 걸음
위로에 기반한 두 사람의 사랑을 포착해 낸 영화 속 소재는 제주 향토 음식 보말죽이다. 제주에서는 바다고동을 보말이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보말죽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진옥이 산송장처럼 누워 눈만 껌뻑이는 남편에게 보말죽을 먹여 줄 때다. 보말 껍데기에 이쑤시개를 넣어 일일이 살을 빼낸 뒤, 걸쭉하게 끓여진 보말죽을 들고 남편이 누워 있는 방으로 향한 진옥은 그를 일으켜 세워 죽을 떠먹이고, 제대로 입을 벌리지도 못하는 남편의 입가에 묻은 보말죽을 닦는다. 평생 남편을 위로하며 살아온 진옥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보말죽은 이후에도 등장하는데 이때 진옥은 남편이 아닌 경훈에게 보말죽을 끓여 준다. 애써 경훈을 밀어내려 했던 진옥은 그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바닷가로 향해 보말을 채집하고, 보말죽을 만들어 그를 찾아간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혼자 누워 앓던 경훈을 위해 진옥은 방안 커튼을 걷고, 그런 그를 경훈은 “진옥이 삼촌?”이라며 반긴다. 푸석한 얼굴의 경훈은 보말죽을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보말죽, 처음 들어봐요. 엄청 맛있네.”

진옥은 살갑게 웃는 경훈의 환한 얼굴 뒤 그늘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옥은 딸을, 경훈은 여자친구를 바다에서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다에서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의 가슴 속 구멍을 단번에 본 것이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소준문 감독은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본다고 생각해요. 그게 어떤 사연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얼굴이나 몸짓에서 그 상처를 알아보죠. 진옥은 경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상처를 알았어요. 그걸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주는 첫 걸음을 내딛은 게 보말죽 신이에요.”

실실 웃으며 죽을 먹는 경훈이 안쓰러워서였는지, 그의 방 벽에 붙은 자신의 초상화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괜히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진옥은 “나 연예인처럼 찍어준다며. 그거 하자. 촬영”이라며 다큐 촬영을 허락한다. 음식이 있는 곳에는 소 감독의 말처럼 위로가 있고, 위로받은 이들의 마음은 너그러워진다. 경훈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를 밀어내려 했던 진옥은 보말죽을 먹는 경훈을 보고 마음 가는대로 해보기로 한다.

보말죽, 참 ‘수고스러운’ 음식
겉보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보말죽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우선 껍데기에서 일일이 살을 끄집어내야 한다.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에 불과한 보말에서 이쑤시개나 바늘 같은 뾰족한 것으로 살을 발라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빼낸 살의 끝에 달린 내장을 따로 분리한 뒤 으깨서 국물을 내는데 사용하고, 살은 밥과 함께 볶는다. 소 감독이 영화 속 위로의 음식으로 보말죽을 택한 이유도 정성 때문이다. “영화에 진옥이 이쑤시개로 보말 살을 꺼내는 장면이 나오듯 보말은 수고스러운 음식이에요. 경훈을 향한 진옥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옥의 마음뿐만 아니라 경훈의 마음을 잘 반영한 음식이기도 하다. “육지 분들 중 보말이 생소한 분들이 많을 거에요. 저도 제주도에서 맛보기 전까지 보말이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어요. 막연히 ‘전복죽같은 맛이겠구나’ 했는데 첫입을 먹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죠. 제주의 맛을 느꼈어요. 경훈이 진옥에게 느낀 사랑의 감정은 그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느끼는 그의 감정을 맛으로서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53년 간 충무로 골목 지킨 서울의 보말죽 가게
제주도에는 보말죽을 파는 식당이 많지만 서울은 그렇지 않다. 1968년부터 서울 중구 충무로 골목을 지켜온 ‘송죽’이 보말죽을 파는 몇 안 되는 곳이다. 파독 간호사였던 첫 번째 사장님은 환자들에게 줬던 야채죽, 버섯죽 위주로 가게를 시작했다. 80세가 넘어가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2010년 강민정 씨가 가게를 인수했다. 보말죽을 팔기 시작한 것도 그 후부터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보말 철인 6, 7월 늘 보말죽을 먹었다는 그는 지역 특색을 살린 죽을 팔아보자는 마음에 보말죽을 메뉴에 넣었다. 보말은 비양도에 사는 해녀 사촌언니가 비양도 바다에서 채집한 것을 받아다 쓴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여파로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지난해 도산위기에 처했던 송죽은 규모를 대폭 줄여 인근으로 이사했다. 장소의 맛을 잊지 못하는 30~40년 단골손님들은 강 씨에게 “언제 다시 이사가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민을 갔다가 40년 만에 한국에 와 다시 송죽을 찾았다는 분, 송죽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일부러 송죽 옆 호텔에 방을 잡았다는 일본인 관광객도 계세요. 가게를 닫을까도 고민했지만 전통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에 계속 하는 거죠.”

두 달 간 제주도에서 촬영한 빛나는 순간 팀은 무얼 즐겨 먹었을까. 소 감독은 “제주 출신인 고두심 선생님 덕에 맛있는 걸 많이 먹었다”며 식당 몇 곳을 추천했다.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표선 해녀의집 식당’에서는 겡이죽을 맛봤다고 한다. 영화를 찍은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해녀 작업장 인근 딱 하나 있던 식당 ‘정미네 식당’은 우럭매운탕이 일품이었다고.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님을 잃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귀포시 하효동 ‘다육이풍경’에선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던 고두심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랑하는데 밥을 안 먹으면 감정적으로 가짜 같은 느낌이 있다. 함께 무엇을 먹는 것이 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소 감독의 말처럼 음식이 전하는 위로는 혀뿐만 아닌 가슴으로도 전달된다는 걸 위 식당들에서 느껴보는 건 어떨까.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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