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삶을 되찾기 위해 이름을 훔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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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구유 옮김/332쪽·1만5000원·은행나무

그릇과 책과 연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사는 주인공 아델라이다 팔콘이 잃어버린 것들은 의미심장하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통치 시절의 베네수엘라를 떠올리게 하는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은 팔콘으로부터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까지 앗아갔다. 잔혹한 폭력이 일상이 된 도시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는 것도, 무언가를 읽고 배우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차베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적 역사를 아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소설이 차베스 정부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차베스는 빈곤 해방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포퓰리즘 정책을 펼친 탓에 결국 베네수엘라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파탄 낸 통치자다. 차베스가 이끌었던 사회주의 혁명인 ‘볼리바르 혁명’의 신봉자들은 정부에 헌신하며 막강한 권력과 이익을 챙겼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끝없는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됐다. 팔콘 역시 ‘혁명의 아이들’ 또는 ‘보안관’으로 불리는 혁명 세력의 피해자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를 잃은 팔콘에게 보안관들은 집마저 앗아간다. 팔콘이 ‘스페인 여자의 딸’로 알려진 아우로라 페랄타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곳에서 페랄타의 시신을 발견한 팔콘은 절대적 빈곤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페랄타가 돼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계획을 세운다. 과연 팔콘은 무사히 베네수엘라를 탈출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이름과 삶을 훔치는 설정은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가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화차는 실종된 약혼녀가 다른 사람의 신분을 훔쳐 살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팔콘의 선택은 베네수엘라의 잔인한 현실과 교차되며 미스터리한 분위기나 박진감을 자아낸다기보다 그저 처절하게만 그려진다. 베네수엘라의 지독한 현실을 정교한 서사와 접목한 이 소설은 단숨에 22개국에 판권이 판매되며 세계적으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20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저자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역시 결국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언론에서만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베네수엘라의 진짜 모습이 궁금한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삶#이름#차벳#민주주의#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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